1장: 프러포즈, 결혼의 시작
'수컷'의 숙명
2020년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줄어든 시기가 있었다. 날을 잡고 친구들과 클럽에 갈 수도 없었고, 직장인 미팅 등 비교적 자연스럽게 노는 분위기의 모임도 모두 제한됐다. 최근에는 이성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14대 14 미팅도 활발히 열리지만 당시는 미팅뿐 아니라 클럽, 술집, 페스티벌이 사실상 전무해 싱글인 처지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러한데, ‘왜 남자가 먼저 구애를 해야 하느냐’라는 반동 기질까지 가지고 있으니 누굴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넷플릭스’로 이런저런 콘텐츠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당시 넷플릭스는 폭발적인 가입자 수에 힘입어 자체 콘텐츠를 적지 않게 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지구의 밤’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지구의 밤’에는 당시 필자가 품었던 의문과 맞닿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왜 남자가 먼저 구애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비단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에 발을 딛고 있는 수컷의 공통적인 숙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한 계기가 됐다.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가 화이트 레이디 헌츠먼 거미(White Lady Huntsman Spider)다. 호주와 뉴질랜드 등에서 발견되는 이 거미는 1.5~3cm에 불과한 몸짓으로 암컷과의 교미를 위해 400미터 이상을 한밤에 이동한다. 생사의 갈림길을 스스로 걷는 수컷. 그러다 경쟁자 수컷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경쟁에 패하면 수백미터를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 마치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암묵적인 대결을 벌이는 것처럼.
도마뱀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일몰 후 집을 떠나지 않는 수컷 도마뱀은 포식자의 눈을 피해 세레나데를 목 놓아 부른다. 그만 세레나데를 부르는 게 아니다. 숱한 수컷 도마뱀이 암컷에게 선택받고자 목청을 높인다. 암컷은 가장 인상적인 소리를 좇아 발걸음을 옮기는데 수컷 집 앞에 도착한 뒤에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몸을 돌린다. 소리와 외모가 마음에 들어야 그의 집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니 예전에 읽었던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 나오는 '수컷 공작'이 문득 떠올랐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날개는 하늘을 날기에도 적합하지 않고 포식자의 눈에 포착되기도 쉽지만,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내용. 암컷 입장에서도 화려한 날개가 생존에 직접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데, 여러 수컷 사이에서 눈에 띄는 날개를 가진 수컷 공작을 선택하기 된다는 취지다. 다윈은 화려한 특성을 가진 수컷을 선택함으로써 암컷은 자신의 유전적 특성을 잘 전달할 수 있는 후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거미, 도마뱀, 사람…. 종을 가리지 않고 수컷은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경쟁하며 선물을 준다는 사실이 어쩌면 ‘수컷의 숙명’이 아닐까. 물론 요즘에는 여자가 먼저 번호를 물어보거나 쪽지를 건네면서 인연이 시작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결혼 과정에서도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술집이나 클럽에서도 합석 제안을 먼저 하는 일도 많아 그 경계가 흐려졌다고 해도 무방할 테지만 보통의 경우에 국한하면 수컷은 암컷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일련의 행동을 개시할 수밖에 없는 운명가지고 태어났다.
다큐멘터리 ‘지구의 밤’과 찰스 다윈의 역작 ‘종의 기원은’ 다소간 필자의 반동 기질을 누그러뜨렸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일부’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해외에서 국내 프러포즈 문화를 다소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하다.
지난해 3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WSJ은 ‘결혼식 전 비싼 장애물-4500달러짜리 프러포즈’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내 프러포즈 문화를 조명했다. WSJ은 “한국인들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디자이너 핸드백과 함께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청혼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한국에서 고가의 프러포즈 트렌드가 커플들에게 압박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등장한 한국인 A씨는 WSJ에 "누구나 호텔 프러포즈를 선호한다. 이는 모든 여성의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WSJ은 기사 마지막 부분에 "한국 결혼율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큰 비용이 드는 호화로운 호텔 프러포즈는 결혼율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커플들에게는 압력을 가하는 웨딩 트렌드"라고 평가했다. 자본주의 산실로 불리는 미국도 고가의 프러포즈는 생경한 장면인 게다.
미국에서는 프러포즈로 주는 반지(선물)가 천차만별이다. 사람과 각자 처한 환경마다 다르겠지만 아마존에서 구매한 20달러짜리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보통은 4000~8000달러 사이 반지를 준비하는 편이라고 한다. 여자친구의 스타일에 따라 반지 가격이나 다이아몬드 크기가 달라지는데 국내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지난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약혼반지 대신 목걸이나 손목시계, 집 지분을 주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한때 ‘남자 월급 3개월 치에 준하는 반지’를 주는 문화가 존재했는데(영국 다이아몬드 회사의 마케팅으로 시작됐다) 일본에서는 비싼 가격에도 자주 착용하지 않는 반지 대신 실용성 있는 선물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변화 속에서도 ‘수컷’이 먼저 반지를 꺼내는 일은 만국공통, 모든 생명체 공통이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