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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유학생 May 18. 2020

주민등록증이 미웠다, Ep.02

잠시 잃어버린 미소

    부모님을 보지 못할 뻔한 나의 수술은 다행히, 응급환자 수술이 잡히는 바람에 미뤄졌다. 그 덕분에 대구에서 헐레벌떡 달려오신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본 후에 수술대에 올라갔고, 인생에서 첫 수술을 경험했다.

    맹장을 떼고, 가스 방출 한 번이면 성공적이라는 수술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어린 미자, 미성년자였던 내게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술이 더 기억에 남았던 이유


    내게 수술이 더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첫 수술이 여서도 아니다. 미성년자 여서도 아니다. 보호자 없이 진행할 뻔해서도 아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 마쳤던 내게 무엇보다도 여전히 촉촉하게 적셔들었던 건 그 당시에 흘렸던 며칠간의 눈물 때문이었다. 


    내 곁에서 매일 함께 할 수 없었던 보호자의 빈자리가 느껴져서 인 걸까. 아니면 그때 당시의 또래와는 다르게 내가 그들에게 정을 주지 못해서였던가. 17세 이후의 나는 늘 외로웠고 공허했다. 그리고 그때의 공허함이 수술 이후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던 병실의 밤. 약 5일간의 병실에서의 밤은 눈물로 젖어갔다. 나는 무엇일까. 이렇게까지 혼자서 멀리서 있어야 할 정도로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남들과는 다르게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수많은 질문들에 휩싸였던 내게 다가왔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눈물만이 나를 채워왔고, 그 안에서 나는 약 1년간 삼켜왔던 눈물들을 뱉어내야만 했다. 그것이 내 기억 속의 맹장 수술이 있었던 그때의 기억이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당시 괜찮냐는 친구들의 문자가 다였고, 그때도 좋아했던 아이돌의 소식을 보러 내려갔던 병원 로비에서의 인터넷이 다였던 당시의 삶. 물론 아빠 엄마가 종종 찾아주긴 했지만, 물리적 거리감에 어쩔 수가 없었던 당시의 기억은 여전히 내게 생생히 남아 마음을 흔든다. 


    당시 엄마께서도 내게 잘해주지 못해, 그때 당시 챙겨주지 못해 마음 한편에 미안함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난히도 미웠던 건 내게 그때 당시의 엄마도 아니다. 단지 난 내 주민등록증이 미웠을 뿐이다. 나를 혼자 수술대에 올라갈 뻔한 그 주민등록증의 역할을 넘어서서, 나 자신을 독립적이라고 형식적으로 정의 내려버린 그 존재가 미웠다. 18세, 그때의 내 주민등록증은 더욱이 나를 혼자로 만들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이때의 아픔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 인생에 이 같은 상황은 끝도 없이 직면했고, 신체적 아픔을 혼자서 극복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많았으니. 그래서 나는 당당히 극한 상황을 3000자로 채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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