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의 주변

믿어도 안 믿는 척 안 믿어도 믿는 척

<책의 주변> 19화

by 이훈보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면 영양소가 파괴된다는 오래된 미신은 미신이 퍼지기 시작한 그즈음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전자파를 이용해 공명을 일으켜 물 분자를 진동한다는 게 영 무서웠다.


기기 내부에 불이 켜지는 것도 그렇고 "우와앙!" 하면서 안쪽 접시가 회전하는 것도 조금은 수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광경을 유리 너머에서 과학자처럼 팔짱을 낀 채로 보게 되니, 과학자에 빙의하여 전자레인지 안의 물건을 음식이 아닌 어떤 실험체로 인식하기가 용이하다. 전자레인지 사용이 흔치 않은 나는 늘 그런 기분에 휩쌓여 괜히 회전체를 노려보게 된다.


전자레인지 안을 보고 있으면 ''좋았어! 잘 익어 간다!' 기 보다는 '어엇 위험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어!'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솔직히 신뢰하지 않는 쪽이 더 인간적이지 않은가. 가스레인지는 그래도 뭐라도 보이지 이건 마치 초능력과 같다. 지이이잉-- 삐비비비-- 띵! 하면 끝이다. 내가 전자레인지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 놈의 능력이 너무 출중하다.


물론 이 모든 게 집에 전자레인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익숙하지 않은 마이크로 도구를 늘 경계하는 것이다. 밀봉된 뭔가를 넣지만 않으면 사실은 안전하고 연구 결과 영양소 파괴도 덜 된다는 뉴스를 몇 번이나 봤음에도 살갑게 굴지 못하고 있다.


머리로는 믿어도 마음이 의혹을 보내는 관계랄까.


그런데 이 관계는 개선되기가 쉽지 않다. 일단 전자레인지의 외형이 크게 바뀌지 않을 테고 나도 평소 전자레인지를 쓰지 않으니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드물다.


이것 만큼은 절대 가격이 비싸서도 아니다. 당근 마켓에 가면 삼만 원 초반이면 넉넉하게 살 수 있으니 비싸서 못 산다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그냥 오래전부터 의심하다 이제는 믿어도 대면 대면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다들 아마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믿는 것 같으면서도 가깝지 않고 안 믿는 것처럼 멀지만 사실은 믿고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전자레인지는 더 많은 친구를 사귈 테지만 그곳에 내가 서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내가 먼저 도태되겠지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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