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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Feb 08. 2021

계량은 진실을 말한다

<책의 주변> 30화

계량은 늘 진실을 말한다. 가슴 아프지만 그렇다.


모든 것을 계량하거나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것도 맞는 말이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고 구분 짓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보면 나도 하나의 사람이라기보다 수억수천 개의 물 분자와 나머지로 되어버려 이렇게 글을 쓸 손가락과 눈동자가 사라져 버린다. 


말을 하기 위해 나는 자른다. 분절에는 구획이 필요하고 그때 숫자는 의미를 갖는다. 상상한 것을 숫자로 자르고 더하거나 빼 의미를 연성한다.


숫자를 본다는 것은 혼란한 와중에 끊어질 실을 붙잡는 것과 같다. 다 놓치는 와중에도 이것마저 잃어서는 안 된다. 숫자를 통해 진실에 도달하는 나는 연결되어 있는 수 조이기도 하고 떨어져 있는 하나이기도 하다. 


아주 그럴듯하게 시작하는 글이지만 실은 게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처음부터 게임 이야기를 하면 정작 이야기하려는 것을 보지 못할까 싶어 약간 돌아가 보았다.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하는 편이 아니다. 끈기도 없고 반사신경도 없다. 심지어 시력도 나쁜 편이다. 오락실에 다닐 때도 알고 있었고 16비트 게임기 시절에도 알고 있었고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도 알고 있었다. 나는 게임에 잼병이었다. 롤이나 오버워치를 할 때도 일정 수준 이상 발전이 없었다. 이건 젊고 늙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재주가 없다. 물론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하기 때문에 재주를 넘어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아무튼 대결을 중심으로 하는 게임을 할 때는 이런 못남이 막연하게나마 드러나지만 혼자 하는 게임을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럴때면 나도 자신감을 갖고 어깨를 으쓱하며 게임을 하곤 하는데 이런 시간이 대결 게임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신감을 잃거든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하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과정이다. 그렇게 대전 게임에 상처 입은 나는 한동안 그 세계를 떠나 싱글 플레이 게임을 시작했고 결국 끝에 도달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아주 여유있었던 양 등을 기대고 게임의 엔딩을 보며 미소를 짓는다. 아니 그런데 이놈들이 게임 통계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아주 서서히 위협적인 기색이 하나 없이 엔딩 크레딧 사이에서 통계가 올라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각각의 스테이지와 보스마다 내가 플레이한 시간과 죽은 횟수 그리고... 


다른 유저들의 평균값이 적혀 있었다.


평균값. 평균값을 들이미니 내가 참 할 말이 없어진다. 간혹 평균 이상의 수치를 기록 할 때도 있었지만 보통의 경우 나는 수치상으로 2배 정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남들이 2번을 죽으면 나는 4번 죽고 남들이 10분 걸리면 깨는 판을 나는 20분에 걸쳐 깼다.

 

내가 게임을 못하는 것은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보스를 깨고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엔딩 크레디트 자리에서 그렇게 팩트 폭력을 당할 줄이야.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하나 하나 살펴본다. 정말 어려운 스테이지 였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드물게 평균보다 높은 숫자를 하나 정도 발견하고 미소 짓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총 플레이 시간은 유저 평균보다 70% 이상 더 길고 사망 횟수는 약 2배 더 높았다.


속이 쓰리다. 절대 커피를 마셔서가 아니다. 


나는 계량의 진실에 노출되어 쓰러지는 분노한 영혼이다. 


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525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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