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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Mar 03. 2021

엄마의 MBTI

<책의 주변> 36화

엄마는 세계의 수호자이고 나는 그걸 깨트리러 온 악당이었다. 나의 세계는 엄마와의 싸움으로 완성되었고 세계의 벽은 모두 통증으로 다져져 있다.


어느 날인가 한 번도 엄마의 MBTI를 궁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깊은 무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세상 궁금증 많은 내가 그걸 놓쳤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지만 친구에게 보내듯 멀리 있는 엄마에게 MBTI 링크를 '띡' 하고 보내줄 수가 없어 그냥 뭉근한 궁금증으로 남겨둘 뿐이었다.


그러다 엄마를 만나러 간 김에 MBTI를 알아보기로 했다.


작은 휴대폰 화면에 깨알 같은 글자들을 읽어가며 질답을 하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라. 약식 MBTI 질문들을 찾아 읽어가며 하나씩 고르기를 반복해 엄마의 MBTI를 알아간다. 적당한 질문을 찾아야 해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보다 엄마에게 돈을 내게 하고 점쟁이가 MBTI 종이를 내밀었다면 일이 한결 수월했으리라.


MBTI를 통해 본 엄마의 성격은 그야말로 나와의 정반대. 엄마는 용감한 수호자 란다. 나의 피에는 개드립이 흐른다는데 엄마는 수호자라니... 엄마의 MBTI에 따른 부모 성향을 보니 내가 경험했던 그 엄마가 글자로 따박따박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해해년년 질문으로 들이받고 엄마는 규칙으로 방어하는 형상이 당연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쇄가 나에게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수호자의 입장에서는 불신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수십 년 동안 굳건하게 세계를 지켜오던 엄마가 나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을 떠올려보면 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비로소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 게 무척 자연스럽다. 어쩌면 차근차근히 대화하는 순간들을 만들어가지 못한 자식의 잘못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엄마는 앞으로도 수호자로 살 것이고 나는 조금은 약해진 수호자에게 어깨를 내주어야 한다. 입은 조금 다물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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