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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Sep 25. 2021

라면, 그 라면을 넘어서

<책의 주변> 48화

요즘 라면을 먹고 있다.


자취하는 이가 라면을 먹는 일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나의 삶을 돌아봐도 라면을 먹는 일이 흔한 일상의 한 단면에 가깝지만 그래도 네 끼 연속 밥도 없이 라면을 먹는 경우는 나에게도 낯선 일이어서 그리고 최근에 라면을 먹는 일은 조금 의미가 있어 적어보기로 했다.


시작은 라멘이었다.


어느 새벽 <라멘 덕후>라는 영화를 보고 라멘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주일쯤 하다가, 결국 동네의 조금 유명한 라멘 가게에 가 혼자 라멘을 먹었다.


자동 주문기 앞에서 라면을 고르고 선택사항을 살펴보다 국물 진하기를 고를 수 있어 진하게를 선택하고 바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예전에 만들어 놓은 주문서 양식을 가만히 읽고 있으니 이 가게의 진하게는 국물이 더 진해지는 게 아니라 더 짜게를 이야기한다고 쓰여 있었다.


염도를 올리는 게 왜 진하게 일까?


물론 그 가게가 다른 가게보다 육수의 맛이 옅어 여러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하게는 국물의 기름기를 이용한 점도와 같은 농도에 가까운 설명이지 더 짜게는 아니지 않은가. 주문을 테이블에서 받던 시절에는 안내문을 보고 사람들이 주문을 했던 것 같은데 자판기 주문에는 그런 보조 설명 없이 진하게라고 적혀 있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어쨌든 라멘은 나왔고 나는 조금 싱겁게 먹는 편이라 첫 입부터 혀가 아렸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라멘이라 즐겁게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또 먹다 보니 조금은 익숙해지기도 해서 끝까지 다 먹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먹다 보니 라멘이라는 것이 꽤 든든했다. 마지막에 밥 한 숟갈 딱 말아먹으면 더 좋았겠지만 없으면 없는 데로 부족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방기 가득한 국물과 염도 그리고 온천 달걀이나 챠슈(고기)와 같은 꾸미들이 올라가 있어 제법 배가 부른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 추석을 쇠고 온 나는 할머니가 정성 들여 싸 주신 전을 반찬삼아 라면을 먹기로 했다. 명절의 느끼함을 씻어내고자 칼칼한 신라면을 끓여 가장 잘 쉬는 두부전과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그게 라면 시리즈의 우연한 첫 끼였다.


다음 끼니도 라면. 전이 많이 남아 우선 라면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처음과 다른 것이 첫날은 상하기 쉬운 두부를 중심으로 아직 냉장고에 넣기 전의 전이었으니 전이 그리 차갑지 않았는데 둘째 날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던 전이 조금 차가운  아닌가. 우리 집에는 전자레인지가 없기 때문에 나는 전을 프라이팬에 데울지 라면을 끓일  함께 넣을지를 고민하다가 라면이  익어버려 그냥 밥상에 앉아 전을 한입 베어 물었. 차갑긴 하지만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차가운 것은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으니 먹을 만했다. 그렇게   끼를 때웠다.

 

 번째 라면. 내가 양이 적은 것인지 애초에 많은 양의 전을 가져온 것인지 전은 좀처럼 줄어드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뜨거운 라면과 차가운 전을 세끼에 걸쳐 번갈아 먹다 이번에는 너무 차가워져 살얼음까지  전을 라면에 담가 데운다. 그리고 문득 국물에 담긴 전을 보고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어디서 본 그림인데...


전이 잔뜩 담긴 라면.. 약간은 진주냉면 같기도 하고 약간은 라멘 같기도 .. 다만 국물이 빨갛고 면과 양념이 흔한 인스턴트인 그것.


가만 보면 라면이 때로는 조금 부족하고 때로는 저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에는 그 건더기 없는 붉은 국물과 그 안에 둥둥 떠있는 면 때문이 아닐까. 만약 여기에 라멘과 같이 충분히 그리고 과감하게 꾸미를 얹는다면 오히려 한국인의 취향에 더 가까운 면요리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인스턴트 라면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미 대학가 어느 작은 라면집에서 했던 변형 인스턴트 라면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5천 원 정도를 받던 특식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중에서 먹는 라멘 중에는 분명 일본에서 만들어진 인스턴트 수프를 그럴듯하게 끓인 뒤 꾸미를 얹는 집들도 있을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조그만 발상의 전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스턴트 라면의 변화를 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만 보면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면에 국물 거기에 화려한 꾸미들만 있으면 되니까

 

한때 영화 <기생충>에서 소고기가 들어간 짜파구리가 너무 낯설어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인스턴트 라면에 들어가는 꾸미를 부조화의 상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리의 전환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냥 그 면요리의 근간이 되는 면과 수프 베이스가 공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가격에 대한 고정관념만 버린다면 시중의 인스턴트 라면은 또 다른 형태의 면요리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물론 유탕 처리된 면에서 나오는 팜유의 맛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의 기름 맛을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발상의 전환 그러니까 인스턴트는 인스턴트 일 뿐이라는 그 벽을 허물기만 한다면 조금은 익숙한 다음 단계의 요리를 맛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게 다섯 끼 째의 라면이었던 소고기, 양배추, 토마토, 어묵을 넣은 라면을 끓여먹기 전의 생각이었다. 이때는 소고기 기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스턴트 라면은 끓이지 않은 건면 제품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다음의 끼니도 이미 라면으로 대체했다. 별 일이 없으면 나는 아마 한동안 벼래 별 것이 다 올라간 라면을 먹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중의 식당에서 명절 라면처럼 전이 잔뜩 올라간 인스턴트 라면을 흔하게  수도 있지 않을까.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가격 체감 저항 때문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온다면 오늘은 당신이  기묘한 모험의  웨이브의 일부가 되길 기원하며 글을 써보았다.


고정관념을 부수고 어마어마한 것을 만들어보자.


끝.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525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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