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주변> 48화
요즘 라면을 먹고 있다.
자취하는 이가 라면을 먹는 일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나의 삶을 돌아봐도 라면을 먹는 일이 흔한 일상의 한 단면에 가깝지만 그래도 네 끼 연속 밥도 없이 라면을 먹는 경우는 나에게도 낯선 일이어서 그리고 최근에 라면을 먹는 일은 조금 의미가 있어 적어보기로 했다.
시작은 라멘이었다.
어느 새벽 <라멘 덕후>라는 영화를 보고 라멘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주일쯤 하다가, 결국 동네의 조금 유명한 라멘 가게에 가 혼자 라멘을 먹었다.
자동 주문기 앞에서 라면을 고르고 선택사항을 살펴보다 국물 진하기를 고를 수 있어 진하게를 선택하고 바 자리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며 예전에 만들어 놓은 주문서 양식을 가만히 읽고 있으니 이 가게의 진하게는 국물이 더 진해지는 게 아니라 더 짜게를 이야기한다고 쓰여 있었다.
염도를 올리는 게 왜 진하게 일까?
물론 그 가게가 다른 가게보다 육수의 맛이 옅어 여러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하게는 국물의 기름기를 이용한 점도와 같은 농도에 가까운 설명이지 더 짜게는 아니지 않은가. 주문을 테이블에서 받던 시절에는 안내문을 보고 사람들이 주문을 했던 것 같은데 자판기 주문에는 그런 보조 설명 없이 진하게라고 적혀 있는 게 조금은 아쉬웠다.
어쨌든 라멘은 나왔고 나는 조금 싱겁게 먹는 편이라 첫 입부터 혀가 아렸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라멘이라 즐겁게 먹으려고 했다. 그리고 또 먹다 보니 조금은 익숙해지기도 해서 끝까지 다 먹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먹다 보니 라멘이라는 것이 꽤 든든했다. 마지막에 밥 한 숟갈 딱 말아먹으면 더 좋았겠지만 없으면 없는 데로 부족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방기 가득한 국물과 염도 그리고 온천 달걀이나 챠슈(고기)와 같은 꾸미들이 올라가 있어 제법 배가 부른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 추석을 쇠고 온 나는 할머니가 정성 들여 싸 주신 전을 반찬삼아 라면을 먹기로 했다. 명절의 느끼함을 씻어내고자 칼칼한 신라면을 끓여 가장 잘 쉬는 두부전과 함께 식사를 시작한다. 그게 라면 시리즈의 우연한 첫 끼였다.
다음 끼니도 라면. 전이 많이 남아 우선 라면을 또 먹기로 했다. 그런데 또 이게 처음과 다른 것이 첫날은 상하기 쉬운 두부를 중심으로 아직 냉장고에 넣기 전의 전이었으니 전이 그리 차갑지 않았는데 둘째 날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던 전이 조금 차가운 것 아닌가. 우리 집에는 전자레인지가 없기 때문에 나는 전을 프라이팬에 데울지 라면을 끓일 때 함께 넣을지를 고민하다가 라면이 다 익어버려 그냥 밥상에 앉아 전을 한입 베어 물었다. 차갑긴 하지만 또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차가운 것은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으니 먹을 만했다. 그렇게 또 한 끼를 때웠다.
세 번째 라면. 내가 양이 적은 것인지 애초에 많은 양의 전을 가져온 것인지 전은 좀처럼 줄어드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뜨거운 라면과 차가운 전을 세끼에 걸쳐 번갈아 먹다 이번에는 너무 차가워져 살얼음까지 낀 전을 라면에 담가 데운다. 그리고 문득 국물에 담긴 전을 보고 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어디서 본 그림인데...
전이 잔뜩 담긴 라면.. 약간은 진주냉면 같기도 하고 약간은 라멘 같기도 한.. 다만 국물이 빨갛고 면과 양념이 흔한 인스턴트인 그것.
가만 보면 라면이 때로는 조금 부족하고 때로는 저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에는 그 건더기 없는 붉은 국물과 그 안에 둥둥 떠있는 면 때문이 아닐까. 만약 여기에 라멘과 같이 충분히 그리고 과감하게 꾸미를 얹는다면 오히려 한국인의 취향에 더 가까운 면요리가 되지 않을까?
물론 그것은 인스턴트 라면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미 대학가 어느 작은 라면집에서 했던 변형 인스턴트 라면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5천 원 정도를 받던 특식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중에서 먹는 라멘 중에는 분명 일본에서 만들어진 인스턴트 수프를 그럴듯하게 끓인 뒤 꾸미를 얹는 집들도 있을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조그만 발상의 전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스턴트 라면의 변화를 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만 보면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면에 국물 거기에 화려한 꾸미들만 있으면 되니까
한때 영화 <기생충>에서 소고기가 들어간 짜파구리가 너무 낯설어서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인스턴트 라면에 들어가는 꾸미를 부조화의 상징으로 볼 것이 아니라 조리의 전환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냥 그 면요리의 근간이 되는 면과 수프 베이스가 공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 가격에 대한 고정관념만 버린다면 시중의 인스턴트 라면은 또 다른 형태의 면요리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물론 유탕 처리된 면에서 나오는 팜유의 맛이 소고기나 돼지고기 닭고기의 기름 맛을 대체하지는 못하겠지만 발상의 전환 그러니까 인스턴트는 인스턴트 일 뿐이라는 그 벽을 허물기만 한다면 조금은 익숙한 다음 단계의 요리를 맛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게 다섯 끼 째의 라면이었던 소고기, 양배추, 토마토, 어묵을 넣은 라면을 끓여먹기 전의 생각이었다. 이때는 소고기 기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스턴트 라면은 끓이지 않은 건면 제품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다음의 끼니도 이미 라면으로 대체했다. 별 일이 없으면 나는 아마 한동안 벼래 별 것이 다 올라간 라면을 먹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중의 식당에서 명절 라면처럼 전이 잔뜩 올라간 인스턴트 라면을 흔하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가격 체감 저항 때문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온다면 오늘은 당신이 그 기묘한 모험의 첫 웨이브의 일부가 되길 기원하며 글을 써보았다.
고정관념을 부수고 어마어마한 것을 만들어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