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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훈보 Jan 27. 2022

럭키, 세계의 약속

추락하는 별에서 3화

바깥은 비. 


나는 알파벳을 익히고 있었다. 연습장에 세 번을 옮겨 쓰고 숨을 고르며 A부터 Z까지 소리 내 읽어 본다. 소리 끝이 떨리지 않게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지만 나는 무척 진지했다. 이렇게 꼼꼼하게 소리를 내면 읽기만 하는 것도 꽤 버겁다.


철자의 마지막까지 충분히 소리 낸 나는 크게 호흡하며 드러누웠다. 숨이라도 쉴 요량으로 열어둔 창 틈으로 빗소리가 들이쳤던 만큼 누울 핑계는 충분했다. 이런 날에는 습기를 좀 날려야 한다며 어머니가 틀어 놓은 보일러의 온기가 은근하다.


나는 그렇게 누워 따뜻함을 즐기다 너를 떠올린다.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빗속을 헤매고 있을 너를 말이다.


성긴 잎 사이로 빛이 다 떨어지는 여름의 등나무 아래에서도 한가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너. 나는 순간 그날의 네 이름이 떠올랐다. 방바닥에 홀로 누워있던 지극히 개인적인 순간에도 나는 그때 느꼈던 충만함 감정이나 냄새보다 먼저 너의 이름을 떠올리고 말았다.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모든 것을 앞질러 오는 너의 이름이 나를 울적하게 한다. 지극히 사랑해 담아두려 했던 것보다 흔한 글자 두어 개가 먼저 도착하는 통에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우울해졌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너에게 편지를 쓰기보다 혼잣말을 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너의 이름과 내내 너를 휘감아온 반짝이는 언어들이 아무리 흘러넘친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위해 연필을 잡는 순간, 나는 짐 진 것들을 의식해 무리하게 되는 것이다. 예쁜 것을 완성하려는 노력에 빠져 어느 순간 너를 잃는다.


오늘도 나는 네가 사라진 공중에서 자를 꺼내 금을 긋는다. 그렇게 세계의 미사여구들 사이에 너는 갇히고 너를 다 잊어버린 나는 선의 깨끗함에 손이 베였다.


너는 나의 이름을 잊어줬을까.


너는 말했다. 오래 전의 왕은 모두의 첫 말을 알아보겠다며 아이를 가두고 키운 일이 있다고, 그때 아기의 입에서 처음 나온 그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한껏 서로를 아끼던 그 소리들이 가장 먼저 나왔다면 나는 오늘 덜 슬플 것 같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온 아기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아는 것과 똑같다고 환호했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하나부터 열까지 오직 창피한 말 만을 떠올린다. 바닥에 드리워진 말풍선엔 네게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허황된 문장들이 가득하다. 나는 누운 채로 결심했다.


'이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만들게.'


마치 브리튼의 어딘가에서 시작된 럭키 편지처럼, 너에 대한 나의 언어가 질병처럼 퍼진다면 그때 모두는 편히 슬퍼할 수 있겠지. 나는 너를 위해 그리고 결국 선만을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옆으로 누우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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