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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대잔치

탕임금, 사도 바울, 공자, 재즈를 생각하며...

by 도시파도

'대학'을 보면, 은나라의 명군 탕임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탕임금은 매일 세수를 하며, 대야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한글로 해석하면, "진실로 날로 새로워져라, 날로 날로 새로워져라, 또 날로 새로워져라"(날을 새롭게 하라 혹은 오늘이 새롭다 등으로 해석하지만, 여기서 日은 부사, 新은 자동사로 해석하고, 여기서 '나'를 생략해서 해석하는 게 자연스럽다.) 나 자신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 일화는 사람의 끊임없는 '수신'과 '정치'를 강조하는 일화다.

이 일화를 볼 때마다, 연상되는 건 저 지구 반대편 사막을 힘들게 걷고 있는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다. 그의 편지를 모은 로마서엔 이런 글이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그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독하게 모래 바람을 뚫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매일 새롭게 자신을 연마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둘이 역사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은나라 탕임금은 기원전 1600년 경 사람이고, 사도 바울은 기원후 1세기 사람이라 1700년의 시차가 난다. 지금으로 치면,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21세기의 시차다. 개인적으로 문명 전파설을 옹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렇게 비슷한 말과 삶의 자세를 지닌 두 사람이 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의미 있는 말인 것도 놀랍다.

대학의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은 '일신'을 3번 '변주'하며 강조한다. 중국의 글들은 강조할 때, 똑같은 말을 copy & paste하지 않는다. 항상 변주(variation)을 거치며, 말의 맛을 살린다. 그래서 글로 쓰였을 뿐 중국 고전들은 하나의 시이며, 노래다. 언어가 시이고, 노래였던 그 태초가 고전에 살아있다. 참고로 공자는 무녀인 어머니 밑에 자라, 음악(樂)의 귀재였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전통 음악은 '변주'(variation)와 '즉흥 연주'(improvisation)을 기반으로 한 jazz다. 공자는 뛰어난 재즈 아티스트이며, 중국 고전은 재즈의 맛이 살아있다.

재즈는 미국에서 나온 것이지만, 재즈가 지칭하는 대상은 무한정으로 열려 있다. 뉴올리언스가 재즈의 발상지이지만, 재즈는 미국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재즈는 이른바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에서 나왔고, 흑인 영가는 아프리카의 전통 음악에서 나왔다. 아프리카(물론 이 개념은 유럽이 정해준 것이다.)의 전통 음악은 잘 들어보면, 곡부의 전통 음악과 닮았고, 우리의 전통 음악인 '시나위'와 더욱 닮아 있다. 시나위는 주요 가락(리듬)이 있긴 하지만, 사실 악기마다 제각기 연주하는 다성 음악이며, 악보보다 음을 더 잘게 쪼개서 표현한다.

그렇다고 재즈의 기원이 시나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그 둘은 언제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른다. 난 하나의 문명 기원이 있고, 그것이 퍼져간다는 문명 전파설을 믿지 않는다. 둘 다 종교적 제의 쓰인 건 맞다. 결국 음악이었고, 시였고, 언어였던 그 태초가 있었다. 거기서 춤을 추며 사랑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조선 사람이든, 곡부 사람이든, 케냐의 한 부족의 사람이든.

결국 아무말 대잔치, 아무말 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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