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ies but Goodies

[다이하드 4.0], [007 스카이폴] 그리고 [킹스맨]

by 도시파도

‘같은 강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의 말을 빌릴 것 없이, 우리는 너무나 빠른 변화에 떠밀리듯 살고 있다. 통신만 해도 봉화에서 삐삐와 공중전화를 지나 스마트폰의 SNS로 변했다. SNS라도 2년 사이에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대세가 바뀐 걸 보면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음을 알 수 있다. 서양 미술은 어떠한가? 그리스를 시작으로 해도 아르카익(archaic) 미술에서 헬레니즘 미술 그리고 기하학적 중세 미술을 거쳐 르네상스 미술 그리고 인상주의 이후 세잔, 초현실주의, 큐비즘, 야수파, 다다이즘 그리고 팝 아트와 액션 페인팅까지…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예전의 것이 빠르게 도태되고 대체된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면 예전의 것은 시대의 파도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죽어가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받은 영화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밌는 ‘액션’ 영화들이란 거다. [다이 하드 4.0], [007 스카이폴],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가 그렇다.

다이 하드 시리즈의 주인공은 미국의 일개 경찰에 불과한 존 맥클레인, 이 사람은 혈혈단신으로 수많은 대규모 테러들을 막아버리고, 범죄 집단을 처단한다. 즉 몸으로 하는 건 이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그런 그가 [다이 하드 4.0]에선 디지털 테러를 맞이하게 된다. 몸을 던지고, 총 쏘는 일이라면 몰라도 컴퓨터 해킹엔 쥐약인 그는 아날로그 시대의 인간이지, 디지털 시대는 먼 나라의 이야기다.


존 맥클레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예전의 수사방식으로 유능한 해커를 동료로 데리고 범죄집단을 쳐부수는 것이다. [다이 하드 4.0]의 전개와 존 맥클레인의 해결 방식은 과거를 벗어나지 않는다. 존 맥클레인은 기존의 방식으로 해커라는 사람을 찾아냈고, 컴퓨터 뒤에 숨은 범죄집단을 물리적으로 처단한다. [다이 하드 4.0] 또한 3편의 ‘버디 무비(2명의 주인공이 함께 친해지며, 문제를 해결하는 영화)’를 그대로 이은 채, 적을 디지털 테러로 약간 틀었을 뿐이다.

https://youtu.be/Sy0iewac5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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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ond 007 - Skyfall [opening credits]

Adele - Skyfall [theme song]

www.youtube.com


007 시리즈는 세대를 넘어 누구나 아는 스파이 시리즈다. 바꿔 말하면, 이 시리즈는 오래됐다는 뜻이다. 007의 시작이 냉전 시대 속 스파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시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서 ‘냉전’은 이제 역사책의 용어일 뿐이다. 시리즈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007은 태생적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 대답이 [007 스카이폴]이다.


[007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의 임무 실패와 그의 추락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007 시리즈 자신의 상황과 일치한다. 제임스 본드에 대적할 라울 실바는 다이 하드와 마찬가지로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MI6와 M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로 인해 M은 MI6에 대한 존폐를 묻는 청문회에 출석한다. 그녀는 그 질문에 냉전은 끝났으나, 우리는 ‘테러리스트 개인’이라는 새로운 위험을 맞이하고 있다. MI6의 존재 이유는 거기에 있다며 MI6 그리고 007 시리즈의 정당성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에 맞춰 제임스 본드는 라울 실바의 위협을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해결한다. (007 스카이폴은 어머니 신화로 읽을 수도 있다. 라울 실바가 M을 Mother로 부르거나, 마지막 대결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개인적으로 [007 스카이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따라간 영화로 본다. 영화의 악역인 발렌타인은 [007 스카이폴]의 문제의식에 대해 ‘새로운 것’을 죽이기로 한다. 그는 ‘새로운 것에 의한 자멸’이란 현명한(?) 수단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킹스맨은 최첨단 기술로 무장했으나, 오랜 전통과 매너를 언급하며 예전의 것을 새로운 것과 공존하는 방식으로 발렌타인과 대립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예전의 것이 맞이하는 죽음은 인간의 죽음처럼 사실 체험될 수 없으며, 가능태로 존재할 뿐이다. 성경 속 예수가 살려낸 나사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사 상태로 봐야 한다. ‘가능태’란 회심(回心)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죽음’에 이르는’ 병만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생명은 있을지 언정 영원한 죽음은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예전의 것이 맞이하는 새로운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는 처단이 아니라 질문일 뿐. 스핑크스의 질문을 어떻게 현명하게 대답하는지는 예전의 것이 지녀야 할 몫이다. 헬레니즘 미술은 대답을 못 찾은 채 기하학적 중세 미술로 대체됐다. 그러나 천 년의 가사 상태를 뚫고 나와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예전의 것은 오히려 시대와의 긴장 상황에서 대응함으로써 다시 태어날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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