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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Sep 15. 2018

영화 <퍼펙트 블루>를 봤습니다.

나와 '진짜' 나의 차이

 예전 드라마 속 사춘기 청소년이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겪으며 하는 질문은 대부분 “나다운 게 뭔데?”였다. 글쎄 ‘나’다운 게 뭘까? 내가 이미 ‘나’인데 내가 나다운 걸 따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동어반복’이지 않나. 하지만 청소년 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계속 이 질문을 하곤 한다. 

 

 우리가 그런 고민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만나는 외부 상황이 요구하는 역할과의 충돌 때문이다. “학생이면 이렇게 해야지” “~면 이래야지” 등이 마음에 안 들거나 의심하기 때문에 ‘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성형이 아니라 수많은 환경과 욕망(주로 부모)에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확신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한다. 이 때의 ‘자신’을 자기동일성(Identity)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외부와의 대립으로 자기동일성은 위협받기 시작한다.


 우리가 느끼는 자기동일성의 위협은 스릴러 영화로 승화되곤 한다. <블랙 스완>(2010년 작) 속 발레리나인 주인공 니나는 백조의 호수 주인공 오데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자신이 깨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다. 그런데 스크린 밖에서 보면, 니나는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이지 않나. 그럼 내가 보는 건 나탈리 포트만인가, 니나인가, 오데트인가.. 


 영화 <퍼펙트 블루>(1997년 작)는 일상 속 우리나 배우가 겪는 페르소나(Persona)의 문제를 일본과 한국에 있는 아이돌 가수의 뒷면에 녹여낸다. 우리는 아이돌 문화의 소비자로서 아이돌의 짧은 수명과 비참함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영화는 아이돌 문화와 연예 사업이 가진 어둠을 표현하며 스릴러의 쪼는 맛으로 잘 살려냈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주인공인 “미마”는 아이돌 가수를 그만두고 여배우로 탈바꿈하려 한다. 미마는 사실 그 결정에 자신의 의지는 들어가 있지 않았다. 소속사 사장은 아이돌은 미래가 없다며 여배우를 종용한다. 한때 여가수였던 매니저는 마지못해 부정할 수 없어 단지 미마를 응원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 3명이 모이는 장면은 마치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과도 같다. 미마는 이 상황에서 자기동일성을 위협받는다. 과연 자기다운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이돌 가수인지 배우인지 배우로서 연기하는 캐릭터인지…

 

 우리는 영화 속 미마처럼 항상 외부 상황의 요구 속에서 살아온다. 외부의 요구는 단지 밖에 머물지 않고, 내부에 자리잡아 우리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결국 우리와 다른 우리로 분리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첫 번째 비극이다. 창세기 속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으로부터 퇴출당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이 비극은 우리 모두가 겪는다. 우리는 고민을 나름 겪은 뒤에 “우리 자신”이라는 자기동일성을 형성한다. 우리는 자기동일성을 형성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을 해리성 인격 장애 등으로 판정하고, 정신병원 등에 격리시키곤 한다. 그러나 우리라고 다를 건 없다. 우리가 고민을 겪고 난 뒤에 찾은 해답인 “진짜 나”는 일종의 가상이며, 실제로 고민을 겪기 전의 나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이 인간의 두 번째 비극이다. “진짜 나”는 이미 ‘예전의 나’가 아니다. 

 

 언젠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어느 영화의 상황을 인용했었다. 등장인물이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며 ‘커피 주세요, 크림 빼고’라고 말했다. 그러자 웨이터가 ‘손님, 저희 집에는 애초에 설탕만 있기 때문에 크림 없는 커피는 안 되고, 설탕 없는 커피만 주문하실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진짜” 나라는 건 외부 상황과의 대립 그리고 지양을 통해 등장한다. 즉, 대립하는 외부 상황(설탕 혹은 크림)에 영향을 받은 채 형성되는 자기 자신(커피)이다. 그건 대립 하나 없던 에덴 동산 속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분열을 고민하며 해결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가 고민을 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게 된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진짜” 나라며 해결했다며 착각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2개의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예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비극은 긍정될 수 있다. 만약 지젝이 말한 카페 속 등장인물이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크림이나 시나몬 가루를 놓을 수 없을까요?’라고 카페 웨이터에게 요구한다면, 나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세상을 어느 정도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비극을 그렇게 돌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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