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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Sep 23. 2018

이상과 좌절, 그리고 계속되는 "과정"

헤겔 철학 비판과 헤겔의 멋

 나는 일기예보를 잘 챙겨보지 않는다. 설령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더라도, 딱히 우산을 챙기지 않는다. 물론 귀찮은 것도 있지만, 일기예보는 종종 틀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과학을 통해 날씨를 완벽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이라면, 날씨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할 것 같다. 그 점에서 나는 칸트주의자에 가깝다.


 칸트와 헤겔은 근대를 이끈 대표적 인물이지만, 사실 이 둘은 “사람은 세상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을 꺼낸다. 칸트는 불가능하다고 헤겔은 가능하다고 한다.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말하며,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세상(물자체, Ding an sigh)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순수 이성 비판>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헤겔은 세상과 사람(의식)이 부딪히며(대립하며) 의식의 완벽한 성장을 말한다. 그것이 <정신현상학>의 큰 줄기다. ‘정신’이란 인간(주관)이 세상(객관)을 완벽히 파악한 상태를 일컫는다. 객관(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주관(인간)이 새롭게 귀환하는 성장 스토리다. 창세기 속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받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 


 헤겔은 의식이 정신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종합”으로 해석한다. “종합”은 서로 대립(보완)하는 것이 “크게 보면” 하나로 유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에덴 동산이 신과 인간이 대립하지 않는 조화의 세계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대립하던 신과 인간을 “종합”하고 구원하는 사건이다. 영화 <설국열차> 속 ‘머리칸’과 ‘꼬리칸’ 사이의 전화가 그렇고, 자신의 ‘꼬리’를 ‘입’으로 잡아먹는 뱀(우로보로스), 가격으로 차별하는 ‘시장’과 복지로 차별을 조정하려는 ‘정부’의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헤겔의 결론이 틀림을 안다. 사람(주관)은 절대 세상(객관)을 완벽하게 알 수 없다. 주관과 객관은 일치할 수 없고, 의식은 정신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헤겔은 주관을 과도하게 믿는다는 점에서 주관주의자로 비판받는다. 이성의 한계를 그은 칸트가 보기엔 헤겔은 너무나도 오만한 인간이다. 감히 세상을 다 알 수 있다니… 쯧쯧…


 그래서인지 몰라도 현대철학이 헤겔을 인용하는 방식은 ‘결론’보다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듯하다. 대립, 모순, 변증법 등은 우리에게 익숙할 뿐 아니라 여전한 서양철학의 키워드다. 나 또한 헤겔의 ‘결론’은 비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헤겔이 서술한 성장 스토리, 진보(Progress)의 ‘과정’은 부정할 수 없다. 나는 헤겔을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지만, 과정 속에서 성취한 것은 일종의 성공이다. 헤겔 철학은 ‘실패 속의 성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중용(中庸)> 20장 속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는 “誠(성) 그 자체는 하느님의 도입니다. 誠(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입니다.”를 뜻한다. 사람은 수양의 목표인 誠(성)에 도달할 수 없다. 誠(성)은 마치 헤겔의 ‘정신’처럼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과 같다. 그러나 誠(성)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노력은 부정될 수 없고, 오히려 박수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달려가는 “과정”이 헤겔 철학의 멋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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