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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Nov 10. 2018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봤습니다.

30년이 지나도 여전한 지금, 우리의 "신화"

 

(이제 다시 보면, 모르겠다...)


 나는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내가 봤던 지브리의 영화들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웃집 토토로> 등이었다. 그 영화들은 분명 잘 만들고, 재밌는 영화들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를 세계적 감독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동감하지 못했다. 내게 그 이상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면, <공각기동대>,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까지 생각났다. 그러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확실히 달랐다. 그것은 분명히 세계적인 영화였다.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 <천공의 성 라퓨타>와 마찬가지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주제는 ‘환경 문제’였다. 환경 문제는 크게 보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이지만, 자세히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이기도 하다.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미세 먼지’는 사람이 만든 문명이 초래한 환경문제이면서도, 한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적 문제이기도 하다. 자연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경은 단지 인간만의 관심사일 뿐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환경 문제’의 이중적 구조를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불의 7일간’이란 재앙 이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 세상은 ‘부해’라는 곰팡이 숲에 뒤덮인다. 사람들은 부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그로 인한 외국과의 분쟁을 이어가고 있다.

 

 주인공 ‘나우시카’가 사는 ‘바람 계곡’은 바닷 바람 덕분에 부해로부터 보호받은 곳이었다. 그러나 바람 계곡은 강대국인 트로메키아의 수송선이 불시착하면서, 부해의 곰팡이로부터 잠식당한다. 이러한 서사는 자연 문제가 국제 정치의 문제를 일으키는 동시에, 국제 정치의 문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환경문제는 국제정치의 문제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불시착 이후, 바람계곡의 재해는 바람계곡을 국제 정치의 장으로 끼어들게 한다. 혼자 깨끗하게 살았던 바람계곡은 의도하지 않게 침략받는다. 바람계곡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의 일부(식민지)로 포함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환경문제에 있어서 예외는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 갈등은 결론적으로 ‘환경문제’의 이중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 시작한다. 환경문제와 국제적 갈등 사이의 상호작용을 알아차린 사람은 ‘나우시카’ 뿐이었다. 나우시카는 ‘부해’의 정체를 깨달았고, 이제 영화는 환경문제의 세 번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문제”다. ‘불의 7일간’이란 과거 문명이 폭주한 결과, 문명의 자기파괴였다. 그것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불의 7일간’이란 문명이 자연 뿐 아니라 과거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결과였다. 그로 인해 인간의 문명은 한 번 멸망했고, ‘불의 7일간’ 이전의 과거는 단절됐다.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불의 7일간에 등장하는 '거신병'을 오마주했다.)


 환경문제의 세 번째 모습(과거와 미래의 문제)은 현재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이다. ‘불의 7일간’이란 현재 문명으로 인한 대재앙(Catastrophe)을 은유하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과거란 바로 우리의 현재를 일컫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미세 먼지’ 문제는 사소한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환경 문제는 단지 현재 우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의 세대, 미래의 문제로 봐야 적합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미래 세대와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미래에 어떤 문제가 생길 지 우리는 모른다. 한편 나쁘게 말하면, 대화의 장에 없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화와 합의의 장에 없다는 이유로 미래의 환경 문제를 무시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적 움직임은 대화와 합의의 과정이다. 대화와 합의는 매우 중요하지만, 이것으로 세상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 환경문제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에게 환경은 대화와 합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환경이 우리처럼 선거로 대표를 뽑아 UN총회나 국회에서 연설하지 않는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대화와 합의라는 건 “현재” “우리”들만 입장할 수 있는, 한정된 문제 해결방식이다. 


 환경이나 미래의 인간처럼 대화와 합의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를 ‘타자(他者, The Other)’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다른(Different) 존재를 타자라고 생각하지만, 타자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사회적 갈등들 속 찬성과 반대의 대립은 타자가 아니다. 사실 대립은 서로 싸우긴 하지만, 거울상으로서 사회 속에 있고, 대화와 합의의 과정이다. 오히려 상대방과의 대립, 상대를 비판한다는 건 자기 자신의 주장을 검증하고 더욱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 혼자 연습하는 ‘쉐도우 복싱(Shadow Boxing)’이다. 

 

 결국 환경문제의 해결은 타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대화와 합의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환경문제에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대화와 합의를 만능열쇠로 보는 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나우시카’의 신화적 행동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소는 바람계곡, 트로메키아, 페지테가 모이는 국제 정치의 장이면서, 자연의 대리인 ‘오무’까지 모이는 문명과 자연의 장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갈등은 한마디로 ‘대화와 합의’가 전혀 통하지 않는 타자의 문제 그 자체다. 나우시카는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무’를 전면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그녀는 죽는다. 그러나 그녀는 ‘오무’에 의해 부활한다. 나우시카는 자기 자신을 던짐으로써 부활하고, 세계는 그녀의 희생과 부활로 다시 깨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서사는 신약성서의 서사와 매우 비슷하다. 캐릭터 나우시카는 위대한 지혜와 전적인 포용력으로 대담한 케리그마(선포, Kerygma)를 표현한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시도와 좌절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지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변하기 때문에 항상 동일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아가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던져 타자의 심판을 기다리고 각오하는 것이다. “목숨을 건 도약(Salto Mortale)”이 이것이다. 사랑고백을 생각해보자. 고백대상이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 전혀 모르는 상황(타자의 상황)에서, 우리는 고백하고 타자의 심판을 기다리는 그 긴장감!!! 나우시카는 오무(자연)를 향해 ‘목숨을 건 도약’을 한 것이다. 


 20세기의 기독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2천년 전의 성경을 현재적 관점으로 생생하게 보기 위해서 2천년 전 당시 신화의 가면을 벗겨내는 작업인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를 주창했다. 불트만을 비틀어 말하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더 이상 신화가 아닌 현실과 미래를 애니메이션을 통해 ‘재신화화(再神話化)’ 했다. 그래서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정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목숨을 건 도약”은 그저 내가 해석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일 뿐이다. 원래 신화는 상상력으로 가득 찬 매우 개방적인 텍스트다. 오히려 상상의 여지를 열어놓은 개방성이 신화에게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30년이 지나도, 지금 우리의 “신화”인 것이다. “신화”는 아직도 잠든 채로,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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