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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Nov 13. 2018

장점이 항상 자랑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일본, 내가 읽은 일본 학문 그리고 번역의 중요성

 내게 일본은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각인됐다. 한국은 일본을 베낀다는 말은 심심치 않게 듣기도 하고(뭐 난 그렇게 믿지 않지만), 하지만 경제적 우위에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연히 ‘웬만한 거는 한국보다 더 낫겠지’라는 유물론적 사고가 박혀 있었다(중학생이었는데도!).


 그런데 실제로 간 일본에서 느낀 첫 인상은 ‘왜 이렇게 영어가 안 통하지?’였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고 간 건 아니었다. 일본에선 영어가 잘 안 통하니까 의사소통의 위험을 염두에 두라고 가이드북이 그랬다. 하지만 ‘잘 안 통한다’가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긴 어학실력을 몇 퍼센트라고 수치화하는 건 웃긴 일이니까…


 그래도 상황으로 얘기하면,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잤다는 한국사람도 웬만한 일본사람보다 영어를 잘 할 것이다(물론 이 때 영어는 ‘일상대화로서의 영어’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비영어권 국가 중에서 상당히 높은 평균영어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한국인이 한국인을 옹호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물론 일본여행 중에서 수준 높은 영어실력을 가진 일본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어찌 됐든, 내가 일본여행 중 획득한 사실들은 한국사람들이 자신의 영어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과 경제발전이 영어실력과 별 관련없다는 뻔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나름 한국사람들이 영어 잘 한다는 사실에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이후의 일본여행들과 일본학문들의 명저들을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나에게 충격을 준 일본의 명저들은 많았지만, 그들 중 최고는 다름아닌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였다. 그의 책은 18세기 일본 유교와 19세기 유럽 사회과학을 자유롭게 오고 가며, 자신의 주제를 헤겔(Hegel)의 변증법으로 전개한다. [일본정치사상사연구]는 아시아와 근대 유럽 정신의 창조적인 해석이다. 게다가 마루야마 마사오가 20대 중반에 썼다는 점, 그 때가 파시즘과 근대의 대립이 첨예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는 점은 이 책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사실들이다. 



 현재 일본의 세계적 석학 가라타니 고진 또한 내 충격의 진원지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와 맑스를 종횡무진하며(그의 말에 따르면, ‘트랜스크리틱’하며), 자신의 학문 체계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세웠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가라타니 고진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으로 알지도 모르겠다. 가라타니 고진은 원래 문학비평가였으니까(하지만 난 가라타니 고진의 문학 관련 책은 한 권도 안 읽었다).

 


 앞서 말한 두 명의 공통점은 자신의 독특한 논지를 “단단한 어학(語學, Philology)” 위에서 전개했다는 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논어, 중용 등의 한문 텍스트와 헤겔, 퇴니스, 베버 등의 독일어 텍스트 위에서, 가라타니 고진 또한 칸트, 맑스, 칼 슈미트, 한나 아렌트 등의 독일어와 영어 텍스트 위에서 자신의 학문을 뽐낸다. “어학(語學)은 만학(萬學)의 어머니다.” 이것은 대학생만 되어도 뼈저리게 느끼는 진리다. 세계 유수한 대학들의 영어논문을 술술 읽을 수 있는 사람과 한국어 논문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만드는 결과물의 격차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래서 학문이 위대한 나라에서 어학이 부실하다는 말은 업계 사정을 안다면, 아무도 안 믿을 사실이다. 일본 엘리트들의 어학 실력은 의심할 필요 없이 정점에 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평범한 일본 사람들은 중학교 영어도 힘겨워 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사회 속 엄청난 어학 실력의 격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번역 문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한 “번역 문화”는 “개론서 문화”라고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철학책에 관심있는 사람이면 대개 부딪히는 문제인데, 원서를 읽는 건 무지하게 힘들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많은 걸 얻어 가지도 못 한다. 내가 칸트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바로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 하면 이내 좌절하게 된다. 사실 철학책이나 특히, 고전은 원서와 함께 주석을 읽어야 감이라도 잡힌다. 그러나 주석이 있는 원서를 읽는 것도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린다. 한문고전의 경우, 주석이 원문의 3배 정도 되는 게 다반사다. 나의 최선의 선택은 ‘큰 그림’을 그려줄 개론서를 읽는 것이다. 개론서(Introduction)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적극적인 원서의 번역(Transl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번역과 개론서의 왕국이다. 내가 읽고 싶은 서양철학 한국어 번역서를 도서관에서 찾으려고 하면 가끔 없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어 번역서가 없던 적은 없었다. 개론서로 들어가면, 그 격차가 더욱 체감된다. 개론서의 범위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매우 넓고, 한국어로 한 번 번역되었음에도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 

 

 일본의 ‘번역 문화’는 사실 역사가 매우 깊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한 ‘난학(蘭學, 란가쿠)’이 그 시작이다. 난학은 화란(和蘭)의 학문이다. 화란(和蘭)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란드(Holland)를 가차(假借)한 말이다. 즉, 난학이란 일본이 받아들인 유럽 학문, 서양 학문을 일컫는다. 난학은 유럽 언어로 된 유럽의 근대학문을 일본이 가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대부분은 난학에서 탄생했다. 쉽게 말해서 두 글자로 된 한자어는 거의 난학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 이 문단에서만 해도 [‘역사’, ‘문화’, ‘번역’, ‘학문’, ‘언어’, ‘근대’, ‘과정’, ‘탄생’] 전부 다 난학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한자문명권에서 책 제목을 제외하면, 두 글자로 된 한자어는 오히려 예외에 가깝다. 한자는 기초적으로 ‘단’음절어다

 

 난학의 번역과정은 단순히 유럽 언어를 한자에 대응시키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유럽 문명과 한자 문명의 치열한 이해 속에서 전개됐다. 예를 들어, ‘변화(變化)’는 영어의 ‘Change’를 번역한 말이다. Change의 번역 근거는 중용 23장 속 ‘변하면 생육된다(變則化).’는 문구다. 원래 유학에서 변(變)은 ‘양적, 질적 바뀜’을 말하고, 화(化)는 그걸 뛰어넘는 ‘생성’을 뜻한다. Change는 양자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변화(變化)’로 번역된다. ‘번역’이란 단지 단어와 단어의 대응이 아니라, 문명과 문명 사이의 “창조적 왜곡” 과정이다. 그래서 번역은 파괴이자, 창조다.


 그래서 일본은 국제언어가 아닌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난학의 역사적 토대 덕분에 학문의 첨단을 달릴 수 있던 것이다. 한편 일반적인 일본 사람들은 일본어로도 충분히 세계의 학문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영어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잘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의 번역은 아직 열악하다. 가장 큰 이유는 출판사가 번역가를 너무나도 낮게 대우하는 업계 사정 때문이다. 번역가들의 임금은 그들의 수고로운 작업에 비해 정말 턱없이 낮다. 번역이 학문과 문명을 선도했다는 역사적 진리, 어학은 만학의 어머니라는 진리는 번역가들의 낮은 임금 앞에 빛을 잃어버린다. 만약 이 글을 읽고 번역의 의미와 중요성을 조금 느꼈다면, 이 글은 제 역할을 다 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수많은 외국 학자와 작가들을 한국어로 만나게 해준 친절한 번역가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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