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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Nov 30. 2018

내가 경험한 세계화의 단면

데리다를 말하는 아시아 사람, 중국고전을 말하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람 

 오랜만에 가나 친구를 만났다. 그는 컴퓨터 공학과 경영을 접목하려는 ‘스티브 잡스’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만나기 전에, 자기 친구인 독일인과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친구의 친구를 만나는 것은 해외 여행에서 내게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아프리카 사람과 역사학 박사를 준비하는 독일 사람, 그리고 평범한 한국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상황이 연출됐다. 해외 여행에서나 가능한, 어떤 면에서는 세계화의 사례였다.


(데리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잘생겼다...)

 나는 뻔한 얘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새, 우리들의 대화는 신변잡기적 대화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유럽의 우경화를 비롯한 유럽의 난민과 인종차별 문제에서 유럽 철학으로 흐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칸트의 이율배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자크 데리다의 해체 철학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칸트의 타자 철학에 대한 재조명과 데리다의 텍스트(에크리튀르) 문제에 관한 해체 철학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아시아 사람인데, 유럽 사람한테 유럽 철학을 말하고 있다니…(더구나 칸트는 같이 대화하는 친구와 같은 독일 사람이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대화의 주제는 더욱 확장되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책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수많은 책을 말했지만, 갑자기 처음 듣는 책이 등장했다. “전쟁의 기술(Art of War)”이라는 제목. 둘은 그 책이 정말 좋다며 입을 모았다. 그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책이 경영과 인생에도 교훈을 준다며 매우 추천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돌아간 뒤 나는 그 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책은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쓰인 손무의 <손자병법>의 영어 이름이었다. 


 사실 난 충격 받았다. <손자병법>이라니… <손자병법>은 중국의 대표적인 고전이지 않은가. 아시아의 대표 고전을 다른 대륙의 사람에게 추천받다니, ‘참 내가 기초를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는 자기 성찰로 빠졌다. 칸트와 데리다를 말하면서, <손자병법>을 몰랐다는 건 내게 부끄러움을 남겼다. 물론 누군가는 ‘요즘 세계화 시대인데, 동서(東西)의 구분이 어디 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세계화는 자신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알고 난 후에 건설적인 의미가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속한 문화적 공동체를 모른 채, 다른 문화적 공동체를 알고자 하는 건 의미 있는 교류보다는 끝없는 선망과 동경에 불과하다. 


 개인적인 이유로는, 나는 중국고전에 대한 관심이 있는 편에 속한다. 허술하긴 하지만, <맹자>, <중용> 등의 유교 경전과 <노자> 그리고 <금강경>, <벽암록> 등의 불교 경전을 읽긴 읽었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손자병법>은 의외의 약점이었다. 대화한 친구들은 의도치 않게 내 정곡을 찌른 셈이다. <손자병법>의 문구처럼, ‘이실격허(以實擊虛, 강점으로 약점을 공격해라)’를 제대로 당했다. 솔직히 병법서로 쓰인 <손자병법>에 무슨 철학적 의미가 있을까 해서 넘어간 것도 크다. 그와 함께 <손자병법>을 참고문헌으로 나온 수많은 경영참고서나 자기계발서들이 쏟아져 나오는 출판업계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읽지 않기도 했다. 


 아무튼 약점을 제대로 공략당한 나는 마음을 다 잡고, <손자병법>을 읽었다. <손자병법>은 한마디로 전쟁을 장군 중심의 영웅주의에서 조직 중심의 합리주의로 해석한 책이다. ‘장군’은 이제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합리적인 조직 관리자로 변모한다. 또한 <손자병법>은 전쟁의 핵심을 객관적 데이터 분석으로 보고 있다. 합리적 조직관리와 객관적 데이터 분석, 이 두 가지가 <손자병법>의 핵심이자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만든다. 내용이 이러하니, 경영과 인생에 자주 인용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내가 읽은 중국고전에 연결해보면, <손자병법>은 <노자>와 매우 유사하다. 최소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이실격허(以實擊虛)’는 <노자>의 핵심 개념인 “허(虛)와 실(實)”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문구로 보인다. <노자>에서 허(虛)는 ‘가능성’에, 실(實)은 ‘현실성’에 대응되는 말이다. <손자병법>은 해당 개념들을 ‘약점’과 ‘강점’으로 재해석했다. 또한 <노자>는 전쟁을 상례(喪禮)로 인식한다. 전쟁은 이겨도 져도 결국 병사들의 죽음이 불가피하니, 상례(喪禮)일 수 밖에 없다. <손자병법>의 손자는 전쟁을 신중하게 치뤄야 한다 말한다. 손자는 전쟁의 승리가 ‘상처 뿐인 영광’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그것은 아군의 피해(병사들의 죽음)가 없는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은 없다. 손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를 말한다. 그는 승률 100%라는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객관적 데이터를 가진 상태라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한다. 손자의 철학은 천하무적이 아니라 아군을 지키는 완전한 승리를 원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그의 철학을 함축하는 명구지만, 가장 오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세계화' 시대인 지금에도 의미있는 문구다. 앞서 말한듯이 ‘세계화’는 단지 다른 공동체에 대한 선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계화’는 ‘전 세계의 미국화’를 다르게 부르는 명칭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90년대에 등장한 '세계화'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한 ‘역사의 종언’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20세기의 한국은 열심히 서양을 베끼느라 바빴다. 나는 2018년에도 그런 관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세계화라는 이름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싶다. 우리가 세계의 일부로서 자신의 문화적 다양성을 꽃피우며, 서로 교류하는 미래.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좀 우리 자신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건 신토불이 같은 내셔널리즘이 아니다. 세계에는 유럽과 미국만 있는 게 아니다. 아시아도 아프리카도 라틴 아메리카도 오세아니아도 모두 세계의 일부이며, 세계문명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후보들이다. 어쩌면 지금이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가 필요한 시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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