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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Dec 03. 2018

영화 <디태치먼트>를 봤습니다.

영화와 달리, 현실 속 우리는 '히어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에 대한 불만이 있다. 나는 매우 많은 편이었다. 학교에선 왜 이런 걸 공부해야 하는지, 교사들 중 존경할 만한 스승은 별로 없는지, 더 나아가서 10대 인생의 모든 가치를 수능이란 이름으로 일원화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는 학교가 보이지 않았다. 학교 밖을 나선 스무 살 이후에 나는 학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학교 밖을 나가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란 윤리적 이유보다는 학교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학교에 대한 불만은 대부분 교육의 유용성을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학교는 왜 있는 걸까?, 배워서 뭐할까?’에 대한 현실적 대답을 바라는 것이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의 일부는 교육의 유용성을 변호한다. 말콤 글래드웰은 뉴욕 할렘의 공립고등학교를 예로 들면서, 열악한 가정 환경에 갇히지 않고 수준 높은 공교육을 아이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좋은 직업으로 넘어가는 ‘계급의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를 위해선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이 여의주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예술의 경우, 교육이 인간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책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죽은 시인의 사회>와 <스쿨 오브 락>을 생각하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GTO>를 생각할 것 같다. 분위기가 서로 다른 이들의 공통점은 ‘영웅적인 스승’의 등장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은 점수 위주에 대한 교육에 대항하며 문학의 가치를 가르치고, <스쿨 오브 락>의 듀이 핀은 기성 교육에 반항하는 록 스피릿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GTO>의 오니즈카는 교사의 권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학생들에게 터놓으며, 자신만의 혜안으로 학생의 재능을 캐내고, 학생들의 마음을 연다. 하지만 ‘영웅적인 스승’은 매우 드물고, 소수의 영웅이 교육 구조를 바꾼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이와 달리, 영화 <디태치먼트>가 바라보는 교육 구조에 대한 관점은 현실적이다. <디태치먼트>는 교사들이 왜 자신이 교사가 됐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단지 누군가의 추천으로, 월급이 안정적이어서 교사가 됐다. 그들에게 교사는 밥벌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직업 윤리가 없다고 비판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교사의 안정적인 월급 때문에 배우자 직업으로 선호하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다.


 게다가 교육 구조는 단지 교사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영화 속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지만, 이내 학부모가 찾아와 자기 자식을 비호하고 교사를 학생 앞에서 무시해버린다. 학부모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피드백을 끊어버린다. 이런 사례는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니 추가할 말은 없다. 이 장면은 오히려 ‘학교’가 ‘교육’의 동의어가 아님을 드러낸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교육에서 학교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의 교육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거의 결정 난다. 인간은 학교 이전에 가정에서 교육받기 때문이다. 부르디외는 중산층 가정의 학생이 가난한 가정의 학생보다 학교 성적이 더 좋은 이유를 단지 돈이 아니라 집에서 쓰는 말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중산층 학생은 집에서 쓰는 말이 학교에서 쓰는 말과 가깝기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기 쉽고, 성적도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산층 가정이 쓰는 말이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에 해당한다. 어르신들이 쓰는 ‘밥상머리 교육’이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학교에 왜 다니는 걸까? 우리는 왜 교육받는 걸까?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것처럼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우린 의무교육을 받을 이유가 없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그런 이유로는 교육을 설득할 수 없다. 게다가 교육이 계급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현실을 보면, ‘계급의 사다리’는 옛날 말이다. 그러면 왜 교육받는 걸까? 그래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그런 와중에 수많은 교사들의 흑백 고백장면들과 달리, 헨리 바스는 컬러 화면으로 등장한다. 헨리 바스의 고백은 앞의 그들과 사뭇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아무도 내게 ‘복잡한 현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교사가 됐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알기 위해 교육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헨리 바스는 ‘복잡한 현실’을 극복했을까? 그는 우리가 바라는 ‘영웅적인 스승’일까?


 헨리 바스의 행동은 다른 교사들과 다르긴 하다. 그는 첫 수업부터 내 수업을 듣기 싫으면 나가라고 한다. 그는 영웅적인 스승처럼 학생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는 정말 내버려둔다. 그는 사실 학생 뿐 아니라, 그 누구와 엮이고 싶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의 간호사에게 욕지거리하는 이유도, 동료 교사와의 데이트를 거절하는 이유도 그의 세상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상처받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리’를 두려워한다. 


 헨리 바스가 ‘분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할아버지 때문에 잃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가해자인 할아버지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할아버지는 과거를 매듭짓지 않은 채 탈출해버렸고, 헨리 바스는 계속 과거에 갇혀 있다. 이런 상황은 이창동의 영화 <밀양> 속 여주인공이 맞이한 상황과 같다. 용서의 대상이 사라지자, 용서가 불가능해지고 트라우마는 여전한 현재로 남는다. 그것이 헨리 바스가 맞이한 ‘복잡한 현실’이었다. 이제 헨리 바스는 할아버지가 기억을 되찾기 바랄 뿐이다. 그가 할아버지에게 일기 쓰기를 묻는 것은 할아버지가 치유 받는 게 아니라 절망과 죄의식에 빠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헨리 바스는 최초의 애착 대상인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이다. 그는 트라우마(복잡한 현실)를 극복하지 못한 점에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연약한 주체일 뿐이다. 그는 ‘분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애착’을 회피한다. 애착하지 않으면, 분리될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연약하기 때문에, ‘애착’의 계기를 피할 수도 없다. 그는 ‘에리카‘를 만나게 된다. 


 ‘에리카’는 학생이 아니다. 그녀는 학교 밖 청소년이다. 그래서 헨리 바스는 그녀 앞에선 교사가 아니다. 헨리 바스와 에리카의 동거는 연약한 그들에게 ‘애착’이자 ‘위로’의 시간이다. 하지만 헨리 바스는 더 큰 상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에리카를 떼어내 버린다. 그러나 헨리 바스는 ‘메레디스’의 죽음으로 ‘분리’가 답이 아님을 깨닫는다.


‘메레디스’는 학생이다. 헨리 바스는 교사로서 수업에 열정적인 메레디스와 친해진다. 메레디스는 자신의 사진을 처음 인정해주는 헨리 바스를 만나자 극도로 애착한다. 그러나 헨리 바스는 에리카와 마찬가지로 메레디스를 분리하려 한다. 메레디스는 분리와 애착 사이에서 중심을 잃은 채, 자신을 죽음으로 몬다. 헨리 바스는 ‘메레디스’로부터 분리의 파멸과 자신의 미래를 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분리한 에리카를 다시 찾아간다. 우리는 분리와 애착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헨리 바스는 또 하나의 ‘복잡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복잡한 현실’이자 영화의 핵심인 ‘분리’와 ‘애착’은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애착하다가, 분리되곤 한다. ‘애착’은 ‘분리’로 끝난다. 하지만 ‘분리’라는 실패가 없었으면, 우린 ‘애착’이란 시도를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이다. 영원한 봄 속에 사는 사람은 봄 말고 다른 계절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봄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애착’을 아는 이유는 우리의 애착이 ‘분리’라는 이름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리와 애착은 단지 시간의 선후로서 일방적이지 않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호적인 관계가 된다. 그 때가 바로 애착’이었구나’하면서…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어태치먼트’가 아니라, ‘디태치먼트’다. 우리의 원초적 경험은 ‘분리’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이러한 틀을 그대로 이끌고 간다. 분리는 ‘욕망’에 해당하고, 애착은 ‘충동’에 해당한다. 우리는 최초의 애착 대상인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충동을 겪지만, 이내 분리되어 실패한다. 충동(애착)은 욕망(분리)의 시작점이 된다. 하지만 욕망이 없었으면, 충동은 발견되지 못한다. 충동과 욕망의 상호적 관계는 인간의 끝없는 실패와 고뇌를 영속시킨다. 우리는 인터넷 쇼핑몰의 이미지를 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저거야’하면서 구매하지만, 갖고 나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님을 안다. 그렇지만 우린 다시 인터넷 쇼핑몰에서 상품을 검색한다. 우리는 영원한 실패의 쳇바퀴를 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안은 우리의 영원한 실패를, 연약한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의 사막”이다. 헨리 바스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폐허가 된 교실”에서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을 읽는다. 헨리 바스는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을 말하고, 영화는 끝난다.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은 연약한 주체를 뜻한다. <어셔 가의 몰락>에서 “어셔 가”는 외부의 장소가 아니라, 소설 속 ‘나’의 마음에 대한 투사에 불과하다. “폐허가 된 교실”이 헨리 바스의 마음을 나타낸 것처럼 말이다. 


https://youtu.be/Gi7ImN6wbZA


 연약한 주체를 인정하는 것은 모순되는 두 가지, 분리와 애착을 동시에 생각하는 “이중사고”의 산물이다. “이중사고”는 모순되는 두 가지를 밖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분리’의 사고다. 우리가 교육받는 이유는 우리의 상식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한 상황이 과연 당연한 건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단단하게 또한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게 해준다. “이중사고”가 영화 속 유일한 수업 내용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중사고”의 모티브가 '분리'라고 해서, 우리가 끝없이 '분리'만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미필적 고의로 '메레디스' 같은 피해자를 만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헨리 바스’의 할아버지가 치매로 도망친 것과 달리, 마음의 무게를 느껴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중사고”를 한 번 더 할 필요가 있다. ‘분리’가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이중사고”를 거치는 것이다. 우리는 ‘분리’와 ‘애착’을 동시에 생각하기, ‘분리’와 ‘애착’을 다시 “분리(두 번째 이중사고)”해야 한다.


 두 번째 이중사고는 헨리 바스처럼 무의미한 “폐허가 된 교실”을 껴안는 행위다. 두 번째 이중사고에서 ‘분리(유일한 답이 아니다)’와 ‘애착(껴안는 행위)’은 다시 만난다. “구역질나는 마음의 냉정함(나는 아무것도 아니다)”이라는 차가운 진실을 뜨겁게 껴안는 것이 영화 <디태치먼트>의 결론이자, 절망이고, 희망이다. 어쩌면 “두 번째 이중사고”를 깨닫는 것이 모순되는 수많은 책을 읽고, 모순되는 수많은 지식을 교육받는 이유일지 모른다. 이중사고를 이중사고하는 것, 그것이 이중사고의 본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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