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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파도 Dec 07. 2018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에 관해

왜 중, 고등학생들이 <보헤미안 랩소디>에 열광하는 걸까?

 다들 알다시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열풍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인기를 이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퀸은 세계적인 록 밴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퀸의 팬은 아니었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은 보헤미안 랩소디를 영화관에서 처음 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뮤즈 등에 비하면, 퀸은 마이너였다. 

 

 더욱 내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은 <보헤미안 랩소디>가 중, 고등학생들에게도 유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야 말로 정말 퀸과는 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국에 유행하는 음악은 '방탄소년단'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음악, '볼빨간 사춘기'로 대표되는 포크와 발라드 음악 그리고 '비와이'나 '자이언 티'로 대표되는 힙합과 lo-fi(로파이) 음악으로 삼분된다. 그 곳에 록이 낄 자리는 없다. 갑자기 분위기가 록이 되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기로 했다. 중, 고등학생들이 21세기 아이들이라는 당연한 사실부터 말이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클라이막스는 당연히 1985년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이다. 그러니까 중, 고등학생들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사건에 열광한다. 그들은 자신이 라이브 에이드의 관객이 되길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이라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다른 영화를 떠올렸다. 그것은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내용만 보자면, 마담 D의 살인사건에 관한 추리영화다. 물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내용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그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진면목은 그 내용으로 들어가는 길목과 그 내용을 담는 ‘형식’에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액자식 구성을 띈 영화다. 크게 보면, 한 소녀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란 책을 읽는 영화다. 그 책의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예전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전 이야기’는 자신이 호텔 주인에게 들은 지배인의 과거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 주인의 과거 이야기가 마담 D의 살인사건이다. 그래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마치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4개의 시간(소녀의 책 읽기-작가의 자기 소개-작가와 호텔 주인의 대화-호텔 주인의 과거)이 공존하는 영화다. 


 웨스 앤더슨은 복잡한 4개의 시간을 각 시대에 유행한 영화 화면비율로 표현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화면비율의 전환으로 회상과 복귀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회상과 복귀를 중점으로 볼 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사실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리움을 다루는 영화라는 걸 알게 된다. 호텔 주인이 작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과거(아가사)를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호텔 주인의 이야기는 단지 그의 과거로 머물지 않고, 작가에게 이야기로 전달되고, 독자(소녀)에게 전달되고, 관객에게 전달된다. 그러면서 이야기 뿐 아니라 그리움까지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것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진정한 주제다.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 말이다. 


 플라톤은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상기’로 설명한다. ‘상기’는 이데아(영혼)가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지녔던 기억이 잠들었다가 깨어난 경험이다. 플라톤의 상기론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생의 기억’과 비슷하다. 그래서 플라톤을 이성적이 아니라 낭만적으로 보는 게 맞기도 하다. 정말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묘하게도 ‘그 때가 좋았지’라는 경험이 모든 그리움을 담을 수 없다.


 우리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 소녀처럼 책을 읽으며, 책 속의 과거를 그리워하곤 한다. 옛날 시절에 대한 로망이든, 과거의 위대한 인물을 만나고 싶어하는 생각 등은 그러한 ‘상기’에서 시작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또한 경험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찬 인물이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보헤미안 랩소디>에 열광하는 21세기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그들은 ‘열광하는’ 게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과거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어서 그립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있다. 닿을 수 없는 과거에는 그런 이상한 애틋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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