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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Nov 23. 2020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다.

'반항'은 사춘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힘든 일을 겪는 과정을 말하거나, 힘든 일을 곧 겪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 아니겠냐." 글쎄 나는 '적응'이라는 말이 걸렸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별로 안 든다고,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는 명제를 반박하기에는 충분한 근거가 없었다. 나는 마음의 냉장고 어딘가에 '적응'을 넣어놨다. 그렇게 '적응'은 시간이 지나, 쿰쿰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가끔 꺼낸 '적응'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적응만 했다면, 인간의 문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였다. 문명 이전의 사람들이 적응을 너무 잘했다면, 날카로운 손톱과 누구보다 빠른 다리를 가졌어야 하지 않았나? 문명의 커다란 전환점인 농업 혁명도 적응의 결과라고 하기엔 너무 머나먼 사태다. 그렇게 '적응'에 대한 생각을 대충 요리하고 먹은 다음, 나는 다시 '적응'을 냉장고에 넣었다. 


 몇 년 후,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을 만났다.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내게 화이트헤드는 과정철학이었고, 그 철학이 남미의 해방신학으로 넘어갔고, 그 해방신학의 대표적인 활동가가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정도였다. 처음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읽기>를 읽었을 때, 거대한 산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단지 화이트헤드 철학을 소개하는 책이었지만, "이 이상은 들어가기 힘들겠구나."며 이내 포기했다. 


 그러나 의외로 <이성의 기능>은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았다. 과거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유배당한 선비들이 자연 속에 노는 모습을 쓴 시를 공부했었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는 '자연과 하나가 되니까 좋다' 이런 내용이다. 자연은 생명이 태어난 곳이자 돌아갈 곳인 셈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자연과 생명의 2가지 매커니즘이 존재할 뿐이라 말한다. 자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해지지만, 생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진다. 자연과학의 언어로 바꾸면, 자연은 '평형'을 향해, 생명은 '진화'를 향해 간다.


 <이성의 기능>인데, 왜 갑자기 자연과 생명 이야기를 꺼내냐는 사람이 있을 거 같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화이트헤드는 '자연과 다른 생명의 매커니즘' 전체를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이성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이성은 나뭇가지를 옮겨 댐을 만드는 비버에게도, 집단 내에서 의사소통하는 침팬지에게도, 수분을 위해 화려한 색을 가진 꽃에게도 작용한다. 이성은 적응이 아닌 '반항'이다. 그러니까 적응의 동물은 애초에 없다. 생명 자체가 적응이 아니라 반항이다.


 처음 "인간은 적응이 아니라 반항의 동물이다."라는 말에 조금 시원해졌다. 그런데 과연 "적응과 반항이 그렇게 딱 갈라지는 건가?"라는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마스크를 쓰는 생활에 적응하는 건 맞지만, 마스크 쓰기 자체는 방역의 일종으로 현 상황에 반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적응'에 대한 생각은 '상대적 관계'에 대한 생각으로 발효된 것 같다. 발효된 '상대적 관계'는 한동안 마음의 냉장고에 들어가야 할 듯 하다. '어쩌면 이 과정 전체가 화이트헤드가 말한 이성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냉장고 문을 다시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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