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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Nov 26. 2020

"자유"는 구속의 반대말이 아니다.

인간에게 "규율"의 중요성

 ‘이 사람’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오후 12시까지 자신의 업무를 본다. 오후에는 달리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저녁에는 가끔 술을 마시며 오후 10시에 잠이 든다. 그의 일상은 거의 똑같이 몇십 년째 반복된다. ‘이 사람’의 직업은 뭘까? 


 마치 성공한 CEO의 일상같은 ‘이 사람’의 직업은 소설가다. ‘이 사람’의 이름을 한 번도 안 들은 사람은 드물 것이고, 책을 읽어본 사람도 꽤 있을 거라고 본다. ‘이 사람’의 이름은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많이 읽은 편에 속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글은 상당히 재밌었다. 상당한 성취를 이룬 소설가의 일상이 실제로 판에 박힌 삶이라는 건 의외의 사실이었다. 이른바 '예술가의 삶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마음가는 대로 흘러가지 않나'하는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판에 박힌 일상을 사는 이유가 더욱 눈길이 갔다. 그 이유는 판에 박힌 일상 속에 "사소한 변화"의 꼬리를 잡아낼 수 있어서였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다르면 커다란 변화만 알 뿐이다. 똑같은 시간과 경로를 지나면, "사소한 변화"의 징조를 눈치챌 수 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맞는 말이었다. 창의성이 자유로움에서 시작한다는 순진한 생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하루키의 판에 박힌 삶에 과연 자유가 없는 걸까?"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차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라는 역사적 인물에 니체의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은 산문시다. 책에서 정신의 3가지 단계를 말하는 부분이 있다. 니체는 그것을 '낙타', '사자', '어린 아이'에 비유한다. 낙타는 끊임없이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마음이다. 낙타의 미덕은 '인내'에 있다. 사자는 주인의 사슬을 벗어던진 마음을 말한다. 사자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사자의 미덕은 '자기 절제'에 있다. 어린 아이는 주인과 노예 관계라는 생각 자체를 떠난 마음을 말한다. 어린 아이의 미덕은 '자기 긍정'에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의외로 '낙타'를 강조한다. 낙타는 가장 저열하고 낮은 것처럼 표현하지만 낙타의 인내가 없으면 사자가 될 수 없다. 낙타의 인내가 "무르익어야" 정신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사자가 된다. 나는 이것이 "자유"와 "방종"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자신을 구속하거나 억압하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방종"이다. "방종"은 개인의 권리라는 당위에 기대어 무제한적 해방을 요구하는 기만이다. "자유"는 실은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자율"에 가깝다.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구속과 타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유를 성취할 수 없다. "자유"란 "자기 규율(Self-discipline)"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자기 규율"로 보는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의 것이기도 하다. 그걸 알고 난 후, '낙타-사자-어린아이'가 다르게 읽혔다. 어쩌면 개인의 정신적 성장이 아니라 유럽철학이 생각한 자유의 3가지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낙타'는 신탁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그리스적 자유'로, '사자'는 자기 자신에게 사슬을 채우는 '칸트적 자유'로, '어린 아이'는 니체 자신이 주창하는 '초인'으로 보인다. 니체가 한때 고전학과 교수였다는 전력을 보면, 그렇게 무리한 해석은 아니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QsiSRSgqE4E

 뮤지컬 영화 <드림걸즈>의  <And I'm telling you I'm not going>를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I don't want to be free(난 자유롭고 싶지 않아요)"라는 가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제니퍼 허드슨이 맡은 에피 화이트에게 '낙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자' 그 자체였다. 자기가 자유롭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보며, '과연 이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질문이다.


 "자유"가 해방이 아니라 "자율"로 본다면, 하루키의 일상은 판에 박힌 일상이지만 자유로운 삶일 수 있다. 자신의 자유를 당당하고 대담하게 타자에게 던지는 에피 화이트의 모습도 자유로운 삶일 수 있다.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의 일상도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압박감 등 그런 이유로 떠밀려서 하고 있다면, 자유롭지 않을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상이 "자유"를 그 누구보다 고민한 임마누엘 칸트의 시계 같은 일상과 비슷한 건 우연일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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