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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Dec 02. 2020

책을 읽다가 도중에 덮는 사람들을 위한 변명.

인간의 지성이란 '내용'이 아니라 '방식'이다.

 과거의 나는 책을 거의 안 읽는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 시작한 초기의 책들은 유명한 소설들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그랬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다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는 장면이 나왔다. '오 뭔지 모르겠지만, 있어보이는 책 제목인걸.' 나도 언젠가 '있어 보이는' 책을 읽고자 마음먹었다. 1~2년이 지난 후, 나는 도서관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빌렸다. 2주가 지나서 나는 20페이지 남짓만을 읽고 반납해버렸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지금도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쁜 게 아니었다. 그냥 눈에 안 들어왔다. '재미없어...'(이 책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가 직접적인 이유다. 나의 중도하차 독서 목록은 은근히 길다. 거기에는 유명한 책들이 많았다. (유명한 책들만 읽어서 그렇기도 하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100페이지 남짓 읽다가 하산했고,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80페이지 정도 읽다가 펼치지 않았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도 100페이지를 겨우 넘기다가 내려가버렸다. 니콜로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은 35페이지 정도에서 잠들었다... 그 외의 수많은 책들이 책장에 엑스칼리버처럼 봉인되어 있다.


 처음에는 내가 독서에 습관을 들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서에 취미 붙인 지 나름 5년이 넘어간 지금도, 이 책들은 손이 가지 않는다. 나는 그 5년 사이에, 노자의 <도덕경>과 우치다 타츠루(内田 樹)의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은 2번 읽었다. 그 책들은 나에게 “왜 중도하차했을까”에 대한 답을 주었다. 그 답은 “안 읽어도 돼, 친구야.”였다.


좋은 개론서였음에도, 레비나스는 어렵다.


 그래도 된다. 모든 책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 설령 남들이 명작, 고전이라고 하는 책일지라도. 왕본 <도덕경> 71장에 "知不知, 上"(지부지, 상)을 해석하면 이런 말이다, "알면서도 아는 것 같지 않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즉, 앎(지성)은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 우치다 타츠루 또한 유대교의 학습과정을 설명하면서 무지의 자각을 말한다. 유대교의 학습자세는 '스승(랍비)'을 받드는 것이다. 유대교의 '스승'은 내가 차마 다가갈 수 없는 지혜의 소유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스승'을 받드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앎(지성)은 데이터의 축적만을 의미하는 듯하다. 나는 그것을 역설적으로 잘 드러내는 단어가 인터넷 세계의 '소통'이라고 본다. '소통'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쓰는 것 같진 않다. 직접 및 간접 경험으로 총합했을 때, 그 뉘앙스는 "나랑 다른 의견을 말할 거면, 넌 나가"로 들린다(개인적 편견이었으면 좋겠다). 합의결정이 없는, '확증편향'의 세계다. 그 이유는 이해가 간다. 합의결정은 '대면' 상황에서 일어난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인터넷 세계에서는 내 마음에 안 들면, 인터넷 창을 나가면 된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살아있는 내내 합의결정을 피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우리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순 없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 없는 세상에서, 지성은 예방주사면서, 대처법이다. 지성의 시작은 ‘어 난 이건 모르는데’라는 무지의 자각이다. 지성은 나 자신을 멀리서 보는 방식(능력)이다. 흔히 쓰는 말로 '메타 인지'라고 한다. '메타 인지'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수단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반대다.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무지를 계속 확장하면서 정확하게 서술해야 한다. 무지를 통한 지성은 "난 모르니까, 이제 됐어."하고 마는 단막극이 아니다. 내가 어떤 부분을 모르고, 어떤 부분에 취약한 지를 진단하는 끝없는 과정이다.


  오히려 지성은 지식의 양 그 자체와는 그리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10페이지 읽고(실제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본 적도 없다.), "아, 이 책 엄청 어렵구나, 러시아 문학이 정말 거대하구나"하고 책을 덮으면 그게 '지성'이자 '교양'이다. '교양'을 쌓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모든 분야에 '깔짝깔짝'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무지를 자각한 중, 고등학생들이 오히려 대학생들보다 교양이 더욱 많을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도 '교양'인이 많으면, 소통의 여지가 많아진다. 그런 사회는 자전거 타기와 비슷하다. 자전거는 좌우로 뒤뚱뒤뚱거리지만, 전체적으로는 평형 상태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말로 설명하자니 진짜 이상한 상태다. '동적 평형'을 이루는 자전거 타기처럼, 사회도 그렇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균형이니, 통합이니 하는 이런 말은 자전거 타기 같은 상황을 의미해야 하지 않을까? 확증편향의 세계, 고인물들의 세상에선 그 어떤 새로움도 변화도 없다. 지성 없는 지식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히키코모리'와 비슷하다(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정보화 사회는 “내가 이렇게 많은 정보를 알 수 있구나”가 아닌 “하... 세상에 이렇게나 정보가 많단 말이야?!”라는 압도되는 무력감에서 그 희망이 시작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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