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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Dec 24. 2020

영화 <귀를 기울이면>을 봤습니다.

마냥 '첫사랑 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도 아까운 영화

 2000년대 초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영화에 취미를 붙이기 전에 극장에서 돈 내고 본 몇 안 되는 영화였다. 그리고 수 년 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를 놀라운 눈으로 본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환경문제를 정치문제로 제기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메시지는 20세기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그 의미는 여전하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재앙 이후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지브리 그림체의 매력을 드러낸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속 바람계곡과 <모노노케 히메> 속 타타라 마을의 묘사는 서로 다른 이상 사회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 이후, <귀를 기울이면>을 보았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모두 섭렵하진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면>은 확실하게 앞서 말한 작품들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재미와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 좋은 영화들은 처음(오프닝 시퀀스)에 감독이 다루고 싶은 주제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처음 10분만 집중하면, 대개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나온다(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은 대표적인 예외다.). <귀를 기울이면>은 그런 의미에서 이 조건을 잘 충족한다. <귀를 기울이면>은 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와 함께 일본의 도심지를 비춰주며 시작한다. 이 노래는 거대한 산이 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그러나 화면에는 자연과 정반대인 도심의 밤거리가 등장한다. <귀를 기울이면>의 오프닝 시퀀스는 감독 콘도 요시후미가 자연을 다루었던 기존 작품과는 다른 지브리 작품이 시작한다는 선언이다(참고로, 이 작품의 각본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썼다).


Take Me Home, Country Road


 물론 그의 선언은 오프닝 시퀀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인 ‘시즈쿠’는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노래의 내용과 정반대로 ‘Country Road(고향 가는 길)’를 ‘콘크리트 로드’로 개사해버린다. 그녀는 개사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고향이란 게 와닿지가 않아서 말이야,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건지 몰라.” 감독 콘도 요시후미는 ‘시즈쿠’의 대사를 통해 기존 지브리의 주제의식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시즈쿠’가 자주 가는 학교 도서관이 손으로 쓰는 도서 카드를 디지털 카드로 바꾸기 위해 며칠 닫는 이야기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90년대 사회를 암시한다(이 영화는 1995년에 개봉했다). “과연 이런 세상에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게 가능한 걸까?” 콘도 요시후미는 '나우시카'와 '산'에게 묻고 있다.


번역은 반역이다, 그녀들은 이미 알고 있던 걸까?


 그렇다면 기존의 지브리가 아닌 콘도 요시후미가 집중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술이다. 그는 돌아올 곳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나아갈 곳으로서의 예술을 제시한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시즈쿠’와 ‘세이지’는 각각 문학과 음악에 꿈을 품고 있다. 특히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계기는 도서관 책 속의 도서 카드인데, 그들은 대면하지 않고 도서 카드 속 쓰인 이름으로 서로를 알고 있었다. 취향의 공유와 상상으로 먼저 만난다.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였기 때문에 그들은 만난 셈이다. 도서 카드에 의한 만남은 같은 해에 먼저 개봉한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와도 비슷하다.


 <귀를 기울이면>에서 예술은 단지 소재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예술, 여기서는 문학이 주인공 ‘시즈쿠’의 성장 단계를 은유하기도 한다. 평소에 소설을 좋아하는 중학생 ‘시즈쿠’는 ‘세이지’를 만나면서, 비전이 있는 그의 자세를 보며 좋아하는 감정과 동시에 동경하는 감정을 느낀다.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세이지’처럼 나도 되고 싶다.” 시즈쿠는 연애를 통해 성장한다. 그렇게 찾은 것이 소설 쓰기였다. 요컨대 ‘시즈쿠’는 “독서 - 번역(개사) - 글쓰기”의 3단계를 걸쳐서 자신의 꿈을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시즈쿠’는 자기가 쓴 소설 [귀를 기울이면]에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듯하다. 만족스럽지 못한 글은 ‘시즈쿠’만의 고민이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겸 작가님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만족스럽지 못한’ 글을 칼같이 정의하긴 힘들지만, ‘시즈쿠’에게는 ‘저자의 생각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글이다. 나도 ‘시즈쿠’처럼 그 막히는 경험을 공유한다. 처음에 나는 그 이유를 “나(작가)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쓰기’라는 행동 자체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다.

 

마침 책 제목이 <텍스트의 즐거움>이다, 제목만은 말이다...


 우리는 흔히 작가가 있고, 작가가 어느 날 ‘말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서(그 시작이 책이거나, 운동하는 중에 든 생각이거나, 유튜브이거나, 인스타일 수도 있다.), 그것을 글로 써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반대로 글(텍스트)이 먼저 존재하고 나서, ‘그것을 쓰는 사람(저자, 작가)’과 ‘그것을 읽는 사람(독자)’이 나중에(사후적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 “롤랑 바르트, 당신! 그렇다면 해리포터처럼 마법 펜이 알아서 종이 위를 죽죽 움직이며 글이 써진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질문할 독자 분들이 있으실 것 같다. 나는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글쓰기”를 프린터의 인쇄와 비교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프린터의 인쇄는 컴퓨터(머리)  '이미 완성된 내용' 그대로 복사할 뿐이다. 그러나 “글쓰기 끊임없이 생성  수정 과정을 겪는다. “글쓰기 경험하는 입장으로서  관점은 매우 납득되는데, 사실 글을 쓰기 전에 문장 하나하나를 생각하진 않는다. 주제나 키워드, 어렴풋한 밑그림을 잡고 글을 쓰다 보면, “뭐지, 원래  문단을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하며 삼천포로 자주 빠지곤 한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지우거나 다른 글을 위한 소재로 저장한다(이런 일이 너무 자주 있다…). 그러나 가끔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좋은 글이 죽죽 ‘써질때가 있다(이런 일은 매우 정말 가끔 있다…).


  순간, ‘라는 확고부동한 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도중의 ‘ 여러 방향의 관점과 사고 그리고 신체적 반응 등이 뒤얽히면서 하나의 인격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나중에 텍스트를 완성한  “드디어 내가  글을  썼구나.” 하면서 작가는 사후적으로 등장한다. 사람은 “글쓰기 끝내고 나서야 작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롤랑 바르트의 “저자(작가) 없다 말은 드라마 작가들이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서 ‘신내림 기다리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영화  ‘시즈쿠 미숙한 이유는 그녀의 생각이 무르익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이 해체되는 글쓰기의 마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편 ‘세이지 ‘시즈쿠 꿈을 곁에서 지켜본다. 사실  영화는 너무 아름다운 화면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세이지 출국 전날, ‘시즈쿠 글을 쓰기 위해 평소와 다른 책을 읽으며 ‘세이지 같이 도서관에 있는 장면이다. 사실 보면서도 ‘이게 중학생들의 사랑인가…’  생각이  정도다. 서로 수줍어만  뿐이지, 단순한 ‘좋아한다 아니라 사랑, 존중, 응원 등이 섞인 상당히 성숙한 자세를 보여준다.  영화의 가장 로맨틱한 장면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체 중학생 때 무엇을 한 걸까?


 <귀를 기울이면>은 앞선 지브리 작품들과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대사들이 오고 간다. 예를 들어, 글을 쓰겠다는 딸 ‘시즈쿠’를 앞에 두고 아버지는 “사람은 각자 다르게 살 수 있지만, 다르다는 건 그만큼 힘들 거란다.”라고 말한다(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어른이 비현실적일 수도 있겠다). 재앙 이후의 근미래가 배경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와는 거리감이 차원을 달리 한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속에서도 판타지는 존재한다. 다만 판타지의 위치와 용도가 다를 뿐이다.


 앞의 두 작품들은 머나먼 미래라는 ‘판타지를 보여주는 척’하면서 현실 속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의 판타지는 관객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우회로이자, 설화적 장치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의 판타지는 ‘시즈쿠’의 소설 [귀를 기울이면] 뿐이다(비관적인 사람은 ‘시즈쿠’와 ‘세이지’의 사랑도 비현실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외의 화면은 지브리의 관찰력과 표현력이 덧붙여진 일상들 뿐이다. <귀를 기울이면>의 판타지는 ‘시즈쿠’가 경험한 글쓰기의 마법이자, 성장의 증거 그리고 나아갈 곳으로서의 예술이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모노노케 히메>가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귀를 기울이면>은 현실 속 관객들에게 각자 판타지를 창작해보자(작가가 되어보자)고 말한다.


 첫사랑 영화에서 각도를 조금 틀면, 영화 <귀를 기울이면> 창작  글쓰기의 즐거움을 말하고 싶은 영화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소설의 제목과 같은  아닐까 생각한다. 콘도 요시후미도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소설 [귀를 기울이면] 건넨 ‘시즈쿠 마음처럼 “미숙하지만,  당신이 읽어줬으면(봐줬으면) 합니다.”  마음으로  영화 <귀를 기울이면> 만들었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나는 콘도 요시후미에게  영화를 따뜻하게  받았다.  텍스트는 영화 <귀를 기울이면> 재밌게  감사의 표시이자,  다른 [귀를 기울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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