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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후드 Jan 21. 2021

'코로나 블루'가 주는 교훈

우리에게는 '몸'이 있다.

 전염병 ‘코로나19’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사태다. 개인적으로 외출이 극도로 자제되면서도, 전 세계가 동시에 겪는 전염병이다. 천연두나 흑사병 등의 전염병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도 수많은 사례가 있었다. 단지 유럽 대륙이나 아시아 일부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1990년대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세계화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에 퍼진 매우 강력한 전염병이다. 하나의 전염병을 200여 개의 나라가 거의 동시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사태가 되었다. 비유하자면, 한 반에 200여 명의 수험생들이 동시에 수능을 치는 사태다. 언어영역이 아닌 방역영역을 모든 국민 국가들이 시험을 치룬다. 2020년 트럼프는 알았어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그리고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이 늘었을 것이다. 옆 자리의 학생들은 어떤 답을 적었을지 컨닝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뉴스들은 각국의 코로나 대응을 보도했다. 


 전 세계 국가에 대한 시험지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들어 있다. 시민들의 협동과 정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정보화 수준이다.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나보다 훨씬 전문가들이 많으니 할 말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코로나의 ‘개인적’ 사태다. 바로 “코로나 블루”다. 나는 코로나 사태를 지극히 개인적 사태로 해석하자면, 우리의 신체관에 대한 변혁이다. 교육은 은연 중에 인간의 위대함은 지능이고, 의식이자, 뇌에 대한 특권이라는 걸 심어둔다. 학교에서 지덕체를 강조하지만,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자습하는 걸 보면 체(體)에 대한 경시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지금의 교육은 오직 지(知)에 치중해 있다. 나도 고등학생 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 블루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인간은 뇌만 있지 않다는 걸, 인간은 정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매우 둔감한 나는 작년 10월 즈음에 코로나 블루를 겪었다. 원래 두문불출하는 사람이지만, 9개월 정도 되니 심상치 않은 걸 느꼈다. 그래서 생각해 낸 해결책은 ‘운동’이었다. 당시 우연히 읽은 책이 운동의 정신적 치료 효과를 다루었기 때문에, ‘코로나 블루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시도했다. 놀랍게도 효과는 뛰어났다. 불면증과 우울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서울에서 유행이 된 러닝 크루도 운동의 정신적 치료 효과로서 해석되었다. 

 

 단순한 생각은 더욱 나아가, 뇌가 아닌 전체적 몸에 대한 생각으로 변화되었다.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과거에 이해되지 않는 일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나는 3가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으면서도, 동조할 수 없었다. 바로 ‘건축’과 ‘와인’ 그리고 ‘춤’이었다. 대학 전공과 깊게 관련된 ‘건축’은 내가 정복해야 할 무엇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제외한 예술에 대한 문외한인 내가 건축의 심오함과 언어를 깨우칠 리가 없었다. 나름의 노력을 계속 했었다(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 대한 개론서를 읽고, 고베에 있는 그의 건축물을 찾아갔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고베 소고기만 맛있게 먹었다.). 사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왜’ 대단한 지를 모르겠다. 과거 드라마 ‘대장금’의 대사처럼, 왜 홍시라고 생각했냐고 물으면 홍시 맛이 나서 그랬다는 대답 밖에 못 하는 게 나의 상황이다. 



 와인에 대해서도 똑같다. 가끔 와인 리뷰나 와인을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와인에 대한 감상평이 짤막한 수필 정도로 매우 길다. 그렇게 ‘섬세하게’ 알 수 있다니… 속으로는 ‘그냥 있어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와인은 석사 과정이 분명히 존재하고, 지식 체계가 확실히 존재한다. 그것은 와인 애호가들 사이의 공감대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내가 미묘함을 섬세하게 느낄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언어화되지 않은 아이의 시선이 미진함보다는 순수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최근에는 ‘춤’에 대해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무용이란 중력에 대한 거부라는 니체와 이사도라 던컨의 말처럼, 춤의 세계는 뇌가 중심이 아니라 코어 근육과 견갑골(날개뼈 근육)이 중심이다(참고로 이것도 최근에 알았다). 전문 댄서들이 섬세하게 평가한 아이돌 그룹의 안무 영상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춤의 언어라는 게 이렇게 섬세하고, 다르구나’를 뼈저리게 느꼈다. 솔직히 아이돌 그룹을 보면서, “와, 멋있다.” 밖에 못하는 나의 빈약한 언어를 채우는 전문 댄서 선생님들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언어에 감탄한다. 


 이상 3가지는 ‘몸’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훈련이 전제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은 세계다. 이것을 깨닫게 해준 계기는 ‘코로나 블루’다. 즉 ‘코로나 블루’는 뇌, 정신 중심의 신체관에서 전체적 몸에 대한 신체관으로 변혁하게 만드는 긍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내가 읽었던 책을 다시 살펴보니, 그 이야기를 하던 책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은 <노자>다. <노자>는 흔히 ‘도가도 비상도’로 알고 있지만, 이 책에는 생각보다 많은 테마가 있다. 그 중에 핵심은 귀신(貴身)이다.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 즉 건강이다. <노자>의 핵심인 무위자연은 건강이라 해도 무방하다. 관념에서 해방되어, 전체적 몸의 건강을 살피는 일이 <노자>의 최종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자의 문명 비판이란 결국 '문명이 인간을 병들게 하지 않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대답이다.


 즉 뇌, 정신 그리고 영혼 중심의 신체에서 세포 하나하나를 느끼고자 하는 ‘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신체로 전환하는 계기가 나에게 ‘코로나 블루’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체를 다루는 기술에 대해 생각이 완벽히 전도되었다. 인간의 몸을 다루는 무용과 무술, 인간의 감각과 교육을 동시에 발달시켜야 하는 와인 그리고 인간의 신체가 살아야 할 곳인 건축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이성 중심의 사고에 의해 길러진 ‘늑대아이’가 아니었을까. 단순하고 추상적인 이성의 언어에 도취되어, 복잡하고 미묘한 신체의 언어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 그러면서 ‘논리적’이라는 합리화로 포장한 게 아니었던 걸까? 알고 보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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