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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셜리 Dec 14. 2022

15.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순간 속에서

[...라고 말했다], 이혜정, 길벗어린이

글을 잘 쓰기 위한 100일간의 챌린지
'그림책에서 첫 문장을 빌려오다'
오늘은 [...라고 말했다]에서 첫 문장을 빌려왔습니다.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순간 속에서도 이미 무언가가 자라고 있어. 무언가가 변하고 있어.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당황스럽다. 내 마음은 아직 뜨거운 여름에 머물러 있는데,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간만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일주일 만에 만난 상담 선생님이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두서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니 마음이 한층 헛헛해졌다. 품고 있던 말이 온기가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나?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사람이 사는데 좋은 일만 있겠냐고. 힘들었지만 배운 게 있고 지금은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고 왔는데... 진짜 괜찮은데… 마음이 영 스산하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하루,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던  작은 틈들이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있었나 보다.


집에 돌아와 조금 쉬고 나니 유치원에서 아이가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는 동안 선생님께 인사를 하는데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어깨를 들썩이고 발을 동동 구르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혼자 실없는 농담을 하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개미를 한참 보더니 빨리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출출하다는 아이를 위해 전자레인지에 핫도그를 데우고 케첩을 물결모양으로 뿌려주니 맛있다며 오물오물 먹었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반찬에 찌개를 더해 저녁을 먹었다. 콩나물 무침, 무말랭이, 건고사리나물 같은 반찬들.. 20분 만에 급하게 끓여낸 된장찌개가 다인 저녁식사. 간단하게 아이의 유치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마친 후 정리를 하는데..'휴..'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숨이 나오며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쌀쌀한 날씨 탓에 웅크렸던 몸이 스르르 풀리며 나른한 잠이 몰려왔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상처를 만들고 그것들이 쌓여 세상을 흔들 우울을 만들어 낸다면, 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친절이, 변함없는 하루가, 성실한 출퇴근과 월급이, 아이의 해맑음이 나를 치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텅 비고 채워지고 텅 비고 채워지고 그래서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시간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순간의 연속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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