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가

should가 많아지면 화날 일이 많아진다.

by 채영


사소한 일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정말 사소하다. 문을 조금 세게 닫는다든지, 메시지 답장이 늦는다든지, 누군가가 내가 예상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그 순간에는 분명히 느껴진다. “이건 화날 만한 일이야.”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었나?’


진료실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본다. 사람들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할 때 항상 “상대가 잘못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다른 문장이 숨어 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should를 가지고 산다. 연인은 이 정도는 해줘야 하고, 친구는 이 정도는 알아줘야 하고, 동료는 이 정도는 맞춰줘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대개 말로 꺼내지 않는다. 그냥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그 ‘당연함’이 사실은 나만의 기준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should는 기준이 아니라 기대다. 그리고 기대는 충족되지 않을 가능성을 항상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should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나를 실망시키기 쉬운 구조가 된다. “이건 이렇게 했어야지.” “그 정도는 알아서 해야지.” “이 타이밍에는 이 반응이 나와야지.” 이 문장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자주 분노하게 된다.


흥미로운 건, 분노의 강도가 사건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큰 일에도 담담한데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화를 낸다. 그 차이는 성격이 아니라 should의 밀도에 더 가깝다. 마음속에 촘촘하게 박혀 있는 수많은 ‘이래야 한다’는 문장들. 그 문장들이 깨질 때마다 작은 일도 배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를 줄이기 위해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보다 문장을 바꿔보는 게 더 빠르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해” 대신 “이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보는 것. “왜 저렇게 해?” 대신 “저 사람은 저렇게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보는 것. 이건 체념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다.


아이러니하게도 should를 조금 내려놓으면 사람들이 더 괜찮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서야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기대 위에서 유지되던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계.


우리는 종종 분노를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노는 생각의 문장 구조와 더 가까운 감정이다. 어떤 문장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건 상대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붙잡고 있는 should 때문일까.” 이 질문 하나로 사소한 분노의 절반은 조용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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