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슬픔을 직면할 용기가 있나요?
최근 만났던 한 사람은, 여러 개의 개인 사업을 운영하며 늘 사람들 속에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일을 멈추기 어렵고, 밖에 나가면 늘 웃어야 하고, 돈을 쓰며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겉으로 보면 꽤 단단해 보인다. 오랜 기간 이어온 관계가 끝난 직후, 그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찾아왔다.
관계를 정리하자는 연락을 받은 뒤, 견디기 어렵다며 “약을 세게 써 달라”라고 했다. 아마도 그를 괴롭게 하는 건 이별 그 자체보다도, 연인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신뢰를 지키지 못했다는 수치심이었던 것 같다. 일단 잠을 충분히 자고, 급성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서 이별에 대해 다루어 보자고 생각했다.
며칠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너무 잘 잤고,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약은 길게 처방받고 싶다고 했다. 마음은 이미 정리되었고, 연락처는 모두 차단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라며 새로운 만남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외형 관리도 계획하고 있고, 다시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할 생각이라고 했다. 본인 스스로를 회복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오랜 관계의 끝이 이렇게 빠르게 정리될 수 있을까. 슬픔이나 후회, 미안함 같은 감정은 곱씹고 소화되는 시간을 거쳐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아직은 그 이별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나,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치게 강한 회복력은 정말 건강한 걸까. 어쩌면 그것은 강함이라기보다, 직면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단단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내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이별을 통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새로운 만남을 암시하는 사진을 올렸던 기억. 그리고 그때의 나 역시, 여행과 일, 새로운 계획들로 몇 주를 정신없이 채우며 슬픔을 뒤로 미뤘다는 사실. 그 시기의 나는 슬퍼할 용기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슬픔이 따라잡기 전에 도망치고 있었던 걸까. 회복이 빠르다는 말은 종종 미덕처럼 사용되지만, 어쩌면 어떤 회복은 애도를 생략한 채 기능만 복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슬픔은 충분히 느껴야 녹아 없어진다. 애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멈춤이 필요하다. 충분히 느껴지지 않은 슬픔은 사라지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바꾼다. 더 바쁜 일상으로, 더 빠른 관계로, 더 단단한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이 글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경험이 혼합된 것으로,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