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문화와 삶의 질

기술 개발에도 왜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

by 게코집사

얼마 전 슈카월드 유튜브 채널에서 중국의 '996'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996 운동이란 '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를 의미한다. 이를 근로시간으로 환산하면 휴게시간 제외하면 주 66시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법 위반이다. 중국의 소정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5.5일의 주 44시간이지만 중국 기업들이 암묵적으로 996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노동인권이나 조직문화의 현주소라 생각한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지만 선진국형의 근로문화와는 괴리가 있는 것이다.


난 2010년 초중반에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길지 않은 10년 동안 문화적, 기술적으로 각각 두 번의 큰 변화를 경험했다.

먼저 원페이퍼 보고서 문화이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모든 대기업, 공공기관 등에서 원 페이퍼 혹은 원 슬라이드 보고서가 유행했다. 페이퍼리스, 애자일 경영 등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으로 난 운이 좋게도 이 문화가 정착된 시점에 입사했다. 우리나라의 부정적 보고 문화 중 하나는 '윗사람의 생각 맞추기'를 위한 보고서 작성이다. 원 페이퍼 이전에는 정답 맞히기 및 정성 들인 티를 내기 위한 정형화된 양식의 보고서 생산이 많았고 이는 사무직의 습관적인 야근을 야기했다. 루틴한 보고임에도 빼곡한 내용과 두터운 별첨문서들을 첨부해야 했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핵심만 간추려 빠른 의사결정을 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원페이퍼 보고의 순기능은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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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화적 요인은 주 52시간 제도 도입이다. 2018년에 최초 시행된 이 법은 도입 당시에 현장의 큰 혼란을 야기했다. 사실 나도 이 제도가 싫었다. 당시 인사팀이었던 나는 1~2년 내내 이 제도를 대응(?) 하기 위해 유연근무제도를 만들고 근태 시스템을 다시 설계해야 했다. 직원들의 52시간 준수를 위해 난 그 곱절만큼을 회사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는 반드시 필요한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주 68시간의 법적 상한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업과 경영진은 '근로시간의 상한'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필요하면 밤샘을 불사하고 일하는 게 당연했다. 주 52시간 제도의 도입은, 52라는 숫자보다 '근로시간 상한'에 대한 심리적 제약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한 직원이 새벽까지 야근하고 있다. 이를 본 경영진은 '대견하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야근하는 직원을 보는 경영진들은 '대견하네'와 더불어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닌가?'라는 불편한 감정이 목에 걸리게 되었다. 따라서 회사 내 불필요한 업무 프로세스를 정비하게 되고, 효율적이지 않은 관행들을 찾아내고 없애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근로문화의 변화를 가져온 기술적 요인의 첫 번째는 회사 PC의 SSD 전환이다. 당시에는 이미 SSD가 보편화되었지만 고가로 인해 모든 업무 PC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14~15년 즈음부터 SATA 기반의 SSD의 가격 하락 덕분에 회사 업무 PC에도 본격적으로 SATA SSD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HDD와 SSD의 체감성능 차이는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체감상 3~5배 정도는 빨라진 것 같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부팅 시간과 툭하면 버벅거리고 뻑나던 엑셀, 업무 ERP가 큰 지연 없이 작동되기 시작한 건 SSD 설치 이후였다. 불필요한 대기 시간이 줄면서 업무 효율이 2배 정도는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은 최근 AI의 도입이다. 나는 이미 GPT와 젠스파크 없이는 업무효율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다. 특히 문서 초안을 잡거나, 긴 PDF 문서를 요약하거나, 엑셀 파워쿼리 코딩 함수를 찾는 중간 단계의 작업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다. 이 혜택은 이제는 대부분의 직장인이 누리고 있다.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10년 전과 지금의 업무효율을 비교하면 내 체감상 3배 이상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드웨어의 발전과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각각 1인분씩을 더 해주는 것 같다. 예전에 3시간이 걸리던 일을 지금은 1시간도 안돼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내 삶은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은 것인가?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업무 시간 내 끝내지 못한 일에 괴로워하며 초과근무를 하고 있다. 996만큼은 아니지만 주 52시간은 꽉꽉 채울 때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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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원인은 단순하다. 효율이 늘어난 것 이상으로 회사와 관리자의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원 페이퍼로 양식은 간소화했지만 보고 빈도를 줄이거나 의사결정 단계,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작성시간 감소 이상의 효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과거 보고서보다 이런 부분이 나아졌네'가 아닌 '요즘은 AI도 있고 얼마나 좋은 세상인데 이렇게밖에 못 써?'로 관점이 전환된 것이다. 또한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트렌드가 급격히 변함에 따라 실무 부담이 높아졌다. 제품이나 행사를 기획함에 있어 고민하고 감안해야 할 요소가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


결국 기술 개발은 우리를 도와주는 도구인 동시에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는 채찍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근 들어 생산성보다는 삶의 질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워커홀릭 성향이 강한 나는 퇴근 후에도 휴일에도 좀처럼 업무 생각을 머리에서 놓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며칠간 고민한 내용과 AI가 잠깐 고민해 준 결과물의 차이가 크게 없음을 인식한 순간 불필요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이 만들어준 여백을 인간답게 채우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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