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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Jul 24. 2019

한옥으로 된 서양식 성당에서 서울의 침묵을 느끼다

가회동 성당에서 서울의 고요와 마주했다 

고요했다. 어느 늦은 오후였다. 가회동 성당의 성전에 홀로 앉아있었다. 300석 규모의 성전은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가끔씩 수녀님 한 분이 저녁 예배를 준비하러 들락거리는 정도였다. 성전의 한가운데쯤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 하늘 아래에서 이토록 고요한 곳에 머물러보긴 처음이었다. 그 흔한 자동차 경적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서울의 침묵이 흘렀다. 너무나 생소한 소리였다. 그윽했다. 


침묵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봤다. 언제나 고요를 그리워했다. 없는 게 없는 도시 서울에 없는 유일한 게 고요다. 마침내 서울의 침묵과 마주했다. 정작 침묵과의 대화는 기대만큼 쉽지 않았다. 이내 정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 탓이다. 어쩔 수 없는 도시인이었다. 평생 고요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성전 바깥의 소리를 탐했다. 서울의 소음이 목말랐다. 


가회동 성당은 과묵했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침묵의 소리만 들려줄 뿐이었다. 사방이 칠흑 같은 고요뿐이었다. 성전 안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천정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말 없는 초여름 햇살과 기도하는 중년 남자뿐이었다. 성전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한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두려워졌다. 고요는 무거웠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번 달에 쓸 기사와 다음 달에 쓸 기획이 흩어졌다. 만날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소엔 미뤄뒀던 인생의 고민도 했다. 물론 그건 사랑이다. 번민이 시작됐다. 깨달았다. 지금 들려오는 건 마음의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의 소음이었다.


더 들어가야 했다. 마음의 소음도 세상의 소리도 사라진 곳까지 가봐야 했다. 더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여긴 소란스러운 서울이다. 그런 영적 체험을 쉽사리 허락할 턱이 없다. 영적 체험은 신접 같은 게 아니다. 절대적인 고요와 마주할 때 얻는 경험이다. 침묵이 희귀한 도시에서 영적 체험이 가능할 턱이 없다. 뜻밖에도 가회동 성당은 견고했다. 서울의 침묵을 생각보다 오래 지켜줬다. 평일 오후 가회동 성당은 어쩌면 서울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었다. 이곳이 서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을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묵상했다. 가회동 성당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건축물은 외형으로 평가받기 일쑤다. 건축 행위의 본질이 물질로 형태를 짓는 것이니 어쩔 수는 없다. 종교 건축만큼은 외형이 전부가 돼선 안 된다. 종교 건축의 진가는 건축물의 구조가 조성하는 영적인 분위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종교 건축이 조성한 분위기 속에서 개인이 얻는 영적 체험이야말로 종교 건축의 목표다. 종교 건축은 마음속에서 준공된다.


그래서 교회나 성당을 짓는 건축가들은 기본적으로 마크 로스코와 같은 예술적 태도를 요구받는다. 마크 로스코는 그림으로 형태를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추상주의다. 대신 형태가 없는 내면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표현주의다. 마크 로스코가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로스코는 그림에서 선과 형을 없앴다. 남은 건 색뿐이었다. 로스코는 붉은색과 초록색과 노란색과 검은색만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다. 로스코의 그림은 극과 극의 반응을 얻었다. 네모난 화폭에 붉은 사각형과 초록 사각형만 그려놓은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무의미하다고 치부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냈다며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이 관람객의 마음속에서 완공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이 관람객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지펴져야만 했다.


종교 건축의 건축가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마크 로스코와 별다르지 않다. 로스코의 그림이 마음속에서 완성되듯이 종교 건축 역시 마음속에서 완공되기 때문이다.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다. 건축에서든 미술에서든 형태를 표현하는 게 차라리 쉬운 작업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어렵다. 로스코는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상을 통제하기 위해 아예 로스코 채플을 만들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로스코의 그림들이 철저하게 고요한 공간 안에 놓여 있다. 로스코는 사람들이 느껴주길 바랬다. 


사실 종교 건축가들이 마크 로스코와 같은 접근을 하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와 가톨릭의 예배당인 교회 건축은 오랫동안 세속화돼왔다. 불교의 사찰 건축물들이 산으로 숨어들면서 영적 분위기를 강화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교회 건축의 목적이 종교적 체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퀠른에 있는 퀠른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퀠른 대성당에서도 기도를 올린 적이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관광지에서 고요를 느낀다는 건 불가능했다. 저마다 초를 켜며 신앙을 고백했지만 누구도 자기 안의 예수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원래 퀠른 대성당 건축의 목표부터가 종교적인 게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던 정치적인 장소였다. 종교는 정치에 신성을 더해주는 장치일 뿐이었다. 당연히 퀠른은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으로 중무장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됐다. 신을 숭배한다는 건축물이 신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교회 건축의 세속성은 한국에선 더 노골적이다. 유럽 교회 건축들이 정치와 연루돼 있다면 한국의 교회 건축들은 시장과 밀접하다. 한국은 멀티플렉스 교회들의 천국이다. 멀티플렉스 교회는 교회를 다중복합이용시설로 보는 건축적 접근법이다. 교회 안에서 하루 종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대부분 멀티플렉스 교회들을 지었다. 이런 멀티플렉스 교회들은 1년 365일이 24시간 늘 사람으로 바글거린다. 주말엔 코엑스보다 사람이 더 많다. 신자들은 찬양하러 와서 소비를 하고 간다. 


권투선수 출신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는 중세의 고딕 교회나 현대의 멀티플렉스 교회와 링 위에서 정면대결을 벌인 건축물이다. 빛의 교회의 진가는 벽을 십자가 모양으로 뚫어서 빛이 새어 들어오게 만든 형태에 있지 않다. 그렇게 자연광을 끌어들여서 예배당 내부에 조성한 영적인 분위기에 있다. 빛의 교회의 진가를 느끼려면 예배당에 앉아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안도 다다오가 믿는 자들과 찾는 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영적 체험을 추구해야 한다. 퀠른 성당의 웅장함이나 한국 대형 교회의 화려함은 관람자들을 피동적으로 만든다. 그저 관광객이거나 소비자일 뿐이다. 신자를 소외시키는 종교 건축은 이미 종교적이지 않다. 안도의 교회는 신자가 주인이다.


이제까지 이런 교회를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 있는 방주교회였다.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방주교회는 이름처럼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다. 교회 주변을 낮은 연못이 에워싸고 있다. 흡사 물 위에 떠 있는 교회 같다. 이타미 준은 자연친화적인 건축가로 유명하다. 돌과 흙과 물과 바람 같은 요소를 건축물의 소재로 자주 활용했다. 방주교회 역시 물이 주제였다. 바다에 떠 있는 섬 제주도 위에 물 위에 떠 있는 방주교회를 세웠다.


그렇게 이타미 준은 교회라는 인공적 건축물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워냈다. 이타미 준도 안도 다다오처럼 종교 건축의 최종 목적은 건축물이 사라지는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크 로스코가 선과 형을 깡그리 지워내고 색만으로 표현했던 것과 같다. 영적 체험은 깊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잊는 상태다. 육중한 건축물이 에워싼 공간에서 그런 체험이 가능할 턱이 없다. 안도가 빛이 투과되는 열린 벽을 이용해서 교회라는 건축물의 존재감을 지워냈다면 이타미 준은 주변 환경과 최대한 닮은 건축 재료로 교회가 자연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무념무상의 건축이었다.


덕분에 방주교회에서도 침묵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방주교회에서 들리는 세상의 소리는 소음이 아니었다. 바람과 바다의 소리였다. 금세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의 소리 너머엔 무념무상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흘러갈 뿐이었다. 짧지만 분명한 영적 체험이었다. 


방주교회에서의 체험을 가회동 성당에서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은 번잡한 서울이다. 교회를 멀티플렉스로 성당은 예식장으로 전락시킨 가공할 세속의 도시 말이다. 가회동 성당은 1795년 4월 5일 한국 천주교의 첫 미사가 열린 곳이다. 가회라는 동네 이름부터가 즐거운 만남을 뜻한다.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에서 명동 성당만큼이나 신성한 곳이다. 그런 시간 위에 서 있다고 해서 훌륭한 종교 건축물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역사성을 강조하려다 기념비로 전락하기 쉽다.


2013년 11월 재건축된 가회동 성당은 이런 입지적 불리함과 역사적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방주교회 못지않은 영적 공간이 됐다. 찾는 자와 믿는 자에게 영적인 공간이 돼 주려면 고요해야 한다. 건축이 외면과 내면의 고요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에서 고요를 얻는다는 건 하늘에서 별따기와 같다.


그래서 가회동 성당은 특별한 장치를 했다. 가회동 성당은 바깥채는 한옥으로 돼 있고 안채는 서양식 성당으로 구성돼 있다. 보통 한복을 입은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사제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표현된다. 이런 전통 한옥 구조의 성당은 흔한 게 아니라 눈에 띄는 게 사실이다.


본질은 아니다. 가회동 성당은 한옥의 흔한 중정 구조를 그대로 갖고 왔다. 중정은 안마당이다. 실내는 아니지만 실외도 아닌 중간 지대다. 전통 한옥은 중정을 지나면 안채로 이어지게 된다. 공간은 더 내밀해진다. 바깥과의 심리적 벽도 생겨난다. 가회동 성당은 성전을 이 안채에 마련했다. 신자들은 중정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 건물의 맨 안쪽에 숨어 있는 문을 통해 비로소 성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심리적으론 건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온 상태다. 성전까지 걸어 들어오면서 서울 거리에서 멀리 떠나온 셈이다. 


가회동 성당의 성전에서 느껴지는 서울의 침묵은 바로 한옥식 다중 구조 덕분이다. 실제로는 성전은 가회동 거리와 인접해 있지만 심리적으론 첩첩산중 구중궁궐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빛의 교회처럼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자연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앉으면 마침내 서울의 고요와 만나게 된다.


또 다른 장치도 있다. 가회동 성당은 겉보기엔 주변 한옥과 별 차이가 없다. 바깥채는 별 특징도 없는 전형적인 한옥이다. 덕분에 한옥으로 들어갔는데 성당으로 나오는 기묘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1795년의 첫 미사 풍경이 이랬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식 한옥 안에서 서양식 예배가 진행되는 풍경 말이다. 동시에 방주교회나 빛의 교회처럼 가회동 성당 역시 주변에 묻혀버리는데 성공했다. 가회동 성당은 지하 3층까지 파고 들어가면서 건물 높이까지 일부러 낮췄다. 종교 건축의 궁극은 건물이 존재감을 지우고 사라지는 것이다. 가회동 성당은 그렇게 가회동 속으로 사라진다.


예수는 40일 동안 고요한 광야에서 길을 찾았다. 고요야말로 언제나 영적 체험의 본질이다. 서울엔 광야가 없다. 따라서 서울엔 고요가 없고 서울엔 명상이 없다. 가회동 성당엔 서울의 침묵이 있다.





앞으로 <라이브러리> 매거진에는 그동안 써왔던 글들을 아카이브합니다. 다음화도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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