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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Mar 30. 2020

왕좌의 게임

한진칼 180640

한진칼 주식 5주를 주당 4만400원에 매수했던게 지난 1월 23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주식시장을 독해하는게 이렇게나 즐거운 일이라는걸 몰랐던 때였다. 2019년 5월 29일에 평생 처음 주식 거래를 해보고 나서 거의 반년만의 본격 거래였다. 한진칼 주식을 산 이유는 다른게 아니었다.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이 점입가경이었다. 예전 같으면 싸움구경만 하던가 경기중계만 했을 터였다. 문득 한진칼 지분을 갖고 있는 주주 입장이라면 이 분쟁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마침 2019년 연말에 기관투자자들이 대거 한진칼을 매도해서 주가가 꽤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3월말 주총까진 조원태 회장측과 조현아 전 부사장측의 경영권 분쟁이 지속될건 확실했다. 모르긴 몰라도 주가가 오르지 않을까 짐작했다. 

솔직히 한진칼을 개인투자자로서 그다지 투자하고 싶은 회사는 아니었다. 원래 항공주를 선호하는 편이다. 글로벌화라는 21세기적 흐름과 항공주는 연관이 깊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진정한 21세기는 코로나 사태로 시작됐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글로벌의 연결성은 오히려 강화될 것이다. 다만 연결의 형태와 형식이 달라질 것이다. 어떠한 전염병도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이길 수는 없다.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 창궐 이후에도 세계는 가까워졌다. 코로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까 항공산업도 여러 가지 변화는 겪겠지만 살아남을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나름 전망은 하면서도, 한진칼 주식을 매수하는게 주저됐던건 이유가 있었다. 경영권 분쟁이라는 재료 때문에 단기적 등락을 반복하는 주식은 별로 손대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한진칼은 2019년 2분기부터 3분기 연속 적자였다. 부채비율은 90%에 육박한다. 시장의 가격과 기업의 가치 사이에서 투자 기회를 찾아내는건 흥미진진한 지적 활동이다. 명분도 없는 지저분한 집안 싸움에서 시세차익을 챙기는건 진부한 투기 행위 같았다. 물론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게 돈이다. 흥미롭든 진부하든 돈만 벌면 그만이다. 돈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맞고 틀림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명백한 저가매수 타이밍을 포착하고도 솔직히 잠깐은 주저했었던게 사실이다. 아직도 이렇게나 나이브하다. 정말이나 그렇다. 

역시나 한진칼 주가는 2월엔 정말 순풍에 돛단듯이 상승랠리를 이어갔다. 3월 4일엔 장중 9만6000원까지 찍었다. 52주 최고가였다. 3월 3일에 유튜브 신기주의 비즈니스맨에서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을 다룬지 하루만이었다. 유튜브에서 강성부 펀드와 조현아 부사장과 권홍사 반도건설 회장의 3자 주주 연합은 3월 말 주총에서 승리하긴 어려울거라고 전망했다. 현직 한진칼 주주인게 기업 분석을 하는데 나름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소액주주들이 지금 무엇을 원할지 알 수 있었다. 당사자 중 한 사람이니깐 말이다. 

3월 4일 한진칼이 장중 최고가를 찍었을 때 슬쩍 매도해볼까도 싶었다. 200% 수익률이었다. 안 팔았다. 최소한 3월말 주총까진 더 보유해보고 싶었다. 경영권 분쟁은 주가를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지 주주로서 목격해보고 싶었다. 웬건 3월 증시는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3월 12일 미국 증시의 검은 목요일 이후 코스피 지수는 1400대까지 추락했다. 한진칼 주가도 떨어는 졌다. 그런데도 다시 올랐다. 남매전쟁은 코로나전쟁을 압도했다.  

역시나였다. 3월 27일 한진칼 주총에선 조원태 회장이 낙승했다. 주총 한 주 전 무렵 의결권자문기관들과 기관투자자들과 국민연금까지 차례로 조원태 회장편을 들어줬다. 이미 승기는 조원태 회장측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한진칼 주가도 4만원대까지 떨어졌다. 솔직히 3월 4일에 매도할걸 그랬다 후회했다. 딱 2배 장사였는데. 역시 돈 앞에는 장사가 없다. 피터 린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2루타는 친 셈이었는데. 

그러나 문득 지적인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3월 27일 주총 이후에도 한진칼 주가는 오를까. 4만원대 하던 주가가 3월 27일 주총 당일엔 종가기준 5만7200원까지 올랐다. 이날 개인은 55만2천여주를 대량 매도했다. 분명 차익실현을 노린 매물들이었다. 그런데 3월 27일 주총 당일에 외국인과 기관은 모두 합해서 42만3천여주를 매수했다. 그랬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게 아니었다. 조원태 회장측과 조현아 전 부사장측의 남매전쟁은 이제 겨우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이었다. 이제 한진칼 지분 싸움은 백기사와 주주연합 같은 큰 주주집단들의 이합집산을 넘어서 소액주주들의 지분까지 모조리 흡입해버리는 최종 단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도 증시에서 한진칼 주식은 품절주다. 유통 주식수가 10% 아래로 떨어진걸로 추정된다. 양측이 주식을 다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의 지분 격차가 거의 없는 박빙 상태에서 유통 주식수가 이렇게 줄어들면 주가는 거듭 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은 이미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의 머니 게임이 된지 오래다. 양측 모두 판돈을 너무 많이 걸었다. 무엇보다 도전자측은 이 전쟁에서 딱 한번만 이기면 된다. 임시주총에서 일단 조원태 회장을 끌어내리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조원태 회장이 다시 세를 모아서 리턴 매치를 성사시키는건 말처럼 쉽지 않을 공산이 크다. 강성부 KCGI 회장은 2018년 11월부터 3년째 공성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한번 성 밖으로 쫓겨난 조원태 회장이 강성부 회장처럼 전열을 정비하고 공성전을 벌이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수밖에 없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성을 빼앗기면 끝장이란 말이다. 지금 형세는 대한항공이라는 성을 기업사냥꾼들이 완벽하게 포위한 형국이다. 당연히 주총이 끝났다고 지분 매집을 멈출 수는 없다. 양쪽 모두 오히려 더 매집할 수밖에 없다. 

3월 30일 월요일장의 한진칼 주가 흐름은 2라운드가 시작됐다는걸 보여주고 있었다. 종가기준 7만4300원까지 뛰어올랐다. 개인은 25만8천여주를 팔아서 차익실현을 했다. 반면에 기관과 외국인은 28만주 가까이를 매수했다. 수치만 보면 기관과 외국인이 개인물량을 전부 받아줬단 말이다. 대한항공 경영권 공성전 2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주가였다. 이쯤 되니까 수익률이고 뭐고 끝까지 주식을 안 팔고 싶어졌다. 기자로서만이 아니라 주주로서 전쟁을 구경하는 짜릿함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까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지 궁금해졌다. 정말 어디까지 가봐야 끝장이 날 것인가. 짐작은 간다. 이 싸움은 정말 조원태 회장이 왕좌에서 끌어내려져서 대한항공 성 밖으로 쫓겨나고 성의 주인이 바뀌어야 끝장이 날 것이라는 짐작 말이다. 대단한 대한왕좌의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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