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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프러리 Apr 10. 2020

전쟁과 오일

엑손모빌 XOM

한번 배팅을 해봤다. 뉴욕시간으론 4월 9일 오전 11시. 오펙 플러스의 화상 회의가 열릴 무렵이었다. WTI는 이미 상승세였다. 시장이 오펙 플러스 회의에서 감산에 합의할거라고 예상한다는 의미였다. 사실 제 정신들이라면 그래야 마땅했다.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 가격은 3월 30일엔 배럴당 20.09달러까지 폭락했다. 원인은 사우디와 러시아의 치킨 게임이다. 네가 먼저 감산 안 하면 나도 먼저 감산 안 하겠다는 논리다. 거기에 코로노믹스로 수요까지 줄었다. 코로노믹스는 코로나와 이코노미를 합성한 신조어다. 지금 국제 가 시장은 가격 조절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지금 대서양에선 유조선들이 표류하고 있다. 과잉 생산된 원유를 저장하기도 마땅치 않아서다.

이걸 사우디아라비아의 빈 살만 왕세자나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모르진 않는다. 석유 감산과 국내 정치 상황이 얽혀 있어서 문제다. 함부로 양보했다간 정치적 카리스마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코로나로 잠정 연기하긴 했지만, 푸틴은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 국민 투표를 목전에 두고 있다. 35세의 빈 살만은 방해가 되는 건 무엇이든 제거해버리는걸로 유명하다. 감산은 곧 양보다. 약해보이는건 왕자와 독재자한텐 치명적이다. 스트롱맨들의 숙명이다. 여기에 또 다른 스트롱맨 트럼프 대통령까지 얽혀 있다.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한테 코로나와 유가는 중요한 시험대다. 코로나가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시험대라면 유가는 세계 지도자로서의 시험대다. 트럼프는 반드시 빈 살만과 푸틴의 팔씨름을 중재해내야만 한다. 스트롱거맨이라는걸 입증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배팅을 해봤다. 엑손모빌을 주당 45.1699달러에 3주 매수했다. 이대론 다 죽는다. 공멸이다. 그렇다면 4월 9일 오펙 플러스 회의에선 감산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없을거라고 예측한 것이다. 적잖은 투자자들이 같은 생각으로 ETN에 돈을 넣었다. WTI 연계 레버리지 ETN은 금융감독원이 최고 수준의 소비자 경보를 발령할 정도로 달아오른 상태다. 특히 레버리지 ETN 상품들에 돈이 대거 몰린 상태다. 레버리지 ETN은 유가 상승폭의 두 배를 벌 수 있다. 솔직히 유가 회복에 배팅하려면 상장지수증권이라고 번역되는 ETN에 돈을 넣는게 더 맞다. 내키지가 않는다는게 문제였다. 유가 연계 ETN은 원유 가격에 배팅은 하지만 실제로 원유를 소유하는건 아니다. 유가에 투자할 돈을 해당 자산운용사에 빌려주는 그림이다. 이건 성미에 안 맞는다. 주식을 무한 애정하는건 기업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세차익을 얻을 수도 있고 말이다. ETN은 가격에 배팅하는 파생상품이지 특정 현물의 소유권이 아니다. 별로다.

유가 상승에 배팅한다면서 기껏 엑손모빌을 매수한건, 기업과 주식 애호가다운 투자였던 셈이다. 무엇보다 엑손모빌의 PER이 12.84에 불과했다. 쉐브론은 54.75였고 BP는 21.07이었다. 엑손모빌의 매출과 이익도 등락은 있어도 꾸준해보였다. 물론 이 정도 스터디만 갖고 투자해도 되나 싶긴 했다. 분명 엑손모빌에 관해 모르는 정보들이 많을 것이다. 적어도 재무구조는 건전했다. 게다가 주가는 코로노믹스 이전의 절반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렇다면 설사 좀 손실을 보더라도 포트폴리오에 담고 싶었다.

사실 평소엔 큰 관심이 없던 석유기업까지 살펴보게 된 건 제롬 파월 연준 의장 탓이었다. 파월 연준 의장은 4월 9일 목요일 미국장이 열리기 직전 2조3000억 달러를 들여서 폴른 엔젤까지 구해주는 전대미문의 회사채 매입에 나선다고 밝혔다. 당장 포드와 메이시스가 혜택을 본다. 연준이 달러를 살포해서 BB+ 이하의 타락 천사들까지 구원해준다면 적어도 3월 같은 증시 대폭락은 재현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설사 코로나 사태로 실물 경제가 더 나빠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연준이 은행들의 최종 대부자에 이어 기업들의 최종 투자자로 나서줬기 때문이다. 연쇄 도산 같은 대공황 상황은 이론상으론 벌어질 수가 없게 돼버렸다. 연준은 달러로 시장에서 공포를 닦아내버렸다. 이러면 개인 투자자로서 주식 투자가 더 어려워진다. 우량 기업을 저가에 매수할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아낸게 석유기업이었다. 연준이 시장에 달러를 아무리 풀어도 시장에 기름이 너무 풀려서 주가가 짓눌려 있는 기업들 말이다. 솔직히 엑손모빌과 함께 BP도 사고 싶었다. 엑손모빌 주가는 감산 기대감으로 상승세였지만 BP는 오히려 하락세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신한금융투자를 통해선 BP 매수가 불가능했다. 결국 엑손모빌만 매수했다. 설사 감산 합의가 불발되더라도 엑손모빌은 투자해서 소유할만한 회사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엑손모빌 같은 석유대기업 입장에선 지금 같은 저유가 상황도 나쁘지만은 않다. 이 참에 셰일가스 업체들이 줄도산하면 슬쩍 저가에 쓸어담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배팅은 불발됐다. 실패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불발이다. 오펙 플러스는 감산을 한 것도 감산을 안 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결론을 도출했다. 감산은 하긴 한다. 하루 1000만 배럴 안 팎이다. 그나마도 멕시코는 삐져서 회의 도중에 나가버렸다. 구체적인 감산 일정은 뉴욕시간으론 다음날인 4월 10일 금요일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코로노믹스 수요 감소로 하루 3000만 배럴은 감산해야 유가를 회복시킬 수 있다. 하루 1000만 배럴로는 기별도 안 간다. 덕분에 WTI 유가는 다시 10%나 곤두박질쳤다. 엑손모빌 주가도 43.13으로 떨어졌다. 배팅 실패다. 레버리지 ETN의 괴리율은 그만큼 더 커졌을 수밖에 없다.

4월 10일 금요일엔 오펙 플러스에 이어 G20 에너지 장관 회의가 이어진다. 둘 다 사우디의 호출이다. G20 에너지 장관 회의엔 미국이 참여한다는게 다르다. 미국도 감산에 동참하라는 사우디의 노골적인 요구인 셈이다. 솔직히 하루 전 오펙 플러스 안을 뛰어넘는 극적인 감산 합의에 이르긴 어려워보인다. 감산 아닌 감산 같은 감산 아닌 감산이란 지금의 결과가 대충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오펙 플러스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충분한 감산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는 한계만 노출했다. 아니라면, 유가 상승에 배팅한 ETN 투자자들한텐 대박이지만 말이다. 엑손모빌 주가도 좀 오를테고 말이다. 어쨌든 결과는 10일 미국장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10일은 뉴욕시장 휴장일이다. 부활절 연휴인 굿프라이데이다.

보다 현실적으론, 미국의 물리적 협박이 본격화되길 기대하는게 맞다. 미국 공화당 의원 48명은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한테 협박 편지를 보냈다. “사우디가 스스로 초래한 에너지 위기를 되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국이 취할 수 있는 합당한 보복 조치를 추진할 것”이라고 썼다. 말하자면 미국이 동맹국 사우디의 머리에 총을 겨눈 셈이다. 빈 살만은 사실상 트럼프가 키운 중동 정치인이다. 트럼프의 사위 쿠슈너와 빈 살만은 서로의 휴대폰을 도감청도 하는 절친이다. 코로나와 저유가로 촉발된 디플레이션 위기 앞에서 왕자와 부마의 정치적 우정도 시험대에 들게 됐다. 부마 쿠슈너는 장인 트럼프의 재선이 절실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출구는 공화당 의원들이 말한 것처럼 ‘합당한 보복 조치’ 뿐인지도 모르겠다. 전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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