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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기주 Jul 01. 2019

넷플릭스가 남자친구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유

이노베이터 -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 1화

리드가 타주는 카푸치노를 맛보고 싶었다. 넷플릭스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한텐 기자들을 상대할 때 버릇이 하나 있다. 기자들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커피를 타준다.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서 이런저런 커피를 만들어준다. 넷플릭스와 리드 헤이스팅스를 오래 취재해온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자들 사이에선 꽤 알려져 있고 몇몇 책에서도 묘사된 사실이다.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리드는 그렇게 커피로 기자들의 취향을 저격한다. 넷플릭스가 영화와 드라마로 시청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듯이 말이다.


정작 리드는 한국 기자들한텐 커피를 타주지는 않았다. 넷플릭스가 한국 언론과 본격적으로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월 초로 예정된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을 한 달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리드와 한국 기자들도 넷플릭스와 한국 시청자들처럼 아직 서로에 대해 알아가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분명한 건 리드가 한국 기자들의 커피 취향을 아는 것보다 넷플릭스가 한국 시청자들의 시청 취향을 간파하는 게 더 빠를 거란 점이었다.


리드는 대신 기자들의 취재 취향을 정밀 타격했다. 일대일로 마주 앉자마자 리드는 눈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넷플릭스는 한국 진출이 오히려 늦었어요. 한국은 진작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나라였으니까요. 우리가 준비가 안 됐던 겁니다. 한국은 준비가 됐는데 넷플릭스가 준비가 안 돼 있던 거죠.” 분명 한국 독자들의 취향을 저격할만한 멘트였다. 


넷플릭스, 기술 너머의 사람을 보는 회사

리드 헤이스팅스는 실리콘밸리 CEO 중에서도 언론과의 친화력이 높은 편이다. 희끗한 수염을 기른 훈훈한 외모부터가 호감형이다. 리드는 넷플릭스를 창업하기 직전엔 잠시 정치 활동도 했다. 테크넷이라는 로비 단체를 결성해서 교육 분야에서 활약했다. 유권자들을 상대로 민주당을 위한 정치 자금도 모금했다. 리드는 흔히 긱이나 너드라고 불리는 실리콘밸리의 기술 마니아들과는 다르단 얘기다. 기술과 사람을 모두 다룰 줄 안다. 언론이야 말할 것도 없다.

넷플릭스가 인터넷의 넷과 영화를 뜻하는 플릭스의 합성어인 이름처럼 기술과 예술, 테크롤로지와 인문학이 만나는 교차점에 서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리드 헤이스팅스라는 CEO부터가 태생적으로 기술과 사람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리드는 말했다. “넷플릭스는 예술과 과학을 결합하는 회사입니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기술과 인문이 만나는 교차로에 서 있다고 표현했다. 리드도 마찬가지다. 리드 역시 기술 너머의 사람을 꿰뚫어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다. 리드 헤이스팅스가 스티브 잡스에 이어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선도해나갈 경영자로 꼽히는 이유다.


한국에서 넷플릭스는 <하우스 오브 카드>를 제작한 인터넷 방송국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IT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넷플릭스를 온라인 영화 DVD 유통업에서 출발해서 인터넷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콘텐츠 기업 정도로 이해한다. 리드는 넷플릭스를 그 이상으로 이끌어왔다. 넷플릭스의 본질적 관심은 따로 있다. 사람의 감정이다. 넷플릭스는 기술과 콘텐츠를 교차시켜서 사람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고 사람의 감정을 변화시키는 회사가 되고자 한다. 넷플릭스는 기술 너머의 사람을 보는 회사다.


물론 겉보기에 넷플릭스는 월정액만 내면 영화와 드라마를 무제한으로 감상할 수 있는 인터넷 서비스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파는 것이 영화나 드라마라고만 보면 단견이다.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격이다. 넷플릭스처럼 온라인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했던 업체들은 많았다. 한때 넷플릭스한텐 넘사벽처럼 보였던 대형 비디오 체인 블록버스터도 온라인 사업을 했다. 넷플릭스가 승리한 비결은 따로 있다.


남자친구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서비스

넷플릭스는 영화와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감정 그 자체를 판다. 코미디 영화로는 재미를 팔고 로맨스 영화로는 사랑을 팔고 느와르 영화로는 긴장을 팔고 가족 영화로는 행복을 판다. 취향이란 결국 개인이 선호하는 감성이나 감정을 자극하는 지점을 뜻한다. 취향 저격이란 표현도 결국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감정을 건드려줬을 때를 일컫는 표현이다.


넷플릭스는 콘텐츠를 통해 시청자들의 취향을 저격하려고 한다. 시청자들의 감정 상태에 어울릴만한 콘텐츠를 제공해서 시청자들이 원하는 감정을 팔고자 한다. 이걸 위해 넷플릭스는 정교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발전시켜왔다. 공상과학영화 속 얘기가 아니다. 넷플릭스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취향을 저격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갖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넷플릭스의 비밀이다. 넷플릭스의 야심은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미국에선 “넷플릭스가 남자친구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안다”라는 표현이 관용구처럼 쓰인다.


지난 12월 7일 캘리포니아 로스 가토스의 넷플릭스 본사 회의실에 앉아서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확하게 30년 전인 1986년에 저는 스탠포드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했습니다. 그때부터 컴퓨터라는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류를 위해 쓰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체스를 두는 것처럼 인공지능의 논리적인 영역은 이미 굉장히 많이 발전했습니다. 무인 자동차처럼 비논리적인 연산이 필요한 영역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죠. 감정을 인지하는 인공지능은 체스와 무인자동차의 중간 어느쯤에 있어요. 체스처럼 완성 단계는 아니지만 무인 자동차처럼 초기단계는 아니죠.”


리드는 넷플릭스의 원대한 비전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한 사람의 감정 상태를 넷플릭스가 감지해서 그에게 알맞은 영화나 드라마를 추천하고 그의 감정 상태를 이끌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싶습니다. 그가 화를 내면서 휴대폰을 소파에 집어던졌는지 소파에서 뒹굴거리면서 아주 편안한 상태로 누워있는지를 알아서 넷플릭스를 틀었을 때 딱 맞는 콘텐츠를 즉시 제공해주는 것 말입니다.”


리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 10년 정도면 될까요?” 리드는 2010년 <포춘>이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됐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파괴적 혁신은 10년 후 미래를 상상해야만 합니다.” “10년”은 리드가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 얘기다. 넷플릭스가 이미 10년 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암시였다. 


넷플릭스 본사가 자리한 캘리포니아주 로스 가토스 윈체스터 서클 100번지는 미국 창조경제의 중심지인 실리콘밸리의 지리적 요충지에 해당된다. 1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실리콘밸리의 중심 도시인 산호세로 곧장 이어진다. 85번 국도로는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로 갈 수 있다. 로스 가토스는 오랜 세월 넷플릭스의 본산이었다. 이제 실리콘밸리 사람들한테 쿠퍼티노가 애플의 도시이듯 로스 가토스는 넷플릭스의 동네로 통한다. 2000년대 중후반 넷플릭스와 사생결단 경쟁을 벌였던 라이벌 기업 블록버스터는 일부러 로스 가토스 일대를 자사 광고로 도배한 적도 있다.


스코츠밸리 시절의 넷플릭스

사실 로스 가토스는 넷플릭스의 탄생지는 아니다. 1997년 리드 헤이스팅스가 공동창업자 마크 랜돌프와 넷플릭스를 창업한 곳은 로스 가토스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남쪽 산타크루즈 방향으로 더 내려가면 있는 스코츠밸리였다.


스코츠밸리 시절의 넷플릭스는 스코츠밸리와 실리콘밸리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실리콘밸리의 주류 IT업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기업이었다. 넷플릭스가 첫 번째 사업 아이템으로 잡은 온라인 DVD 배송업이란 비즈니스부터가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엔 뭔가 혁신성이 부족해 보였다. 게다가 당시 홈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주도권은 골리앗 대형 비디오 체인 블록버스터가 쥐고 있었다. 비디오가 대세인 안방극장 시장에서 생소한 DVD를 그것도 우편으로 배송한다는 넷플릭스의 사업 전략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지금의 로스 가토스 넷플릭스 본사를 보면서 당시의 난감했던 상황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넷플릭스는 현재 190여 개국에서 7000만 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상태다. 2014년 매출은 50억 달러에 육박했다. 넷플릭스는 매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자연히 넷플릭스 캠퍼스도 확장일로다. 최근엔 신관 건물까지 지어져서 규모가 더 방대해졌다. 지금도 새로운 건물이 증축 중이었다.


넷플릭스 본사는 겉보기엔 전형적인 캘리포니아풍 건축물이다. 실용성을 극대화한 낮고 넓은 정방형 건물이다.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우주선 모양의 애플 캠퍼스2 같은 건물과는 거리가 멀다. 실내에 들어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회의실 이름들은 하나 같이 영화 제목들이다. <LA 컨피덴셜>도 있고 <카우보이 비밥>도 있다. <글레디에이터> 회의실은 정말 콜로세움 모양으로 책상과 의자가 배치돼 있다. 넷플릭스가 끝장 토론을 벌이는 특별한 장소다. 이것만으로도 넷플릭스 특유의 발랄한 조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오래된 은행을 고쳐서 사용했던 스코츠밸리 시절의 작은 사무실에서 출발한 넷플릭스를 상상하면 격세지감이다.


스코츠밸리 시절이 춥고 가난하기만 했던 것만은 아니다. 넷플릭스의 오늘을 만든 핵심 서비스들 상당수가 당시에 만들어졌다. 우편 봉투를 이용한 DVD 배송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한때 넷플릭스는 미국 우편 시스템의 최대 고객이었다. 넷플릭스 특유의 빨간색 우편 봉투는 어느새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됐다. 심지어 일반 직장에도 넷플릭스의 빨간색 우편물만 따로 분류하는 우체통이 생겨날 정도였다.


넷플릭스의 혁신성은 우편으로 DVD를 배송하자는 아이디어에 있는 게 아니다. 창조 경제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이 기적적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이 바뀐다는 믿는 것이다. 당시 우편으로 DVD를 배송하자는 생각을 한 젊은이는 리드 헤이스팅스와 마크 랜돌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편 비용이 벽이었다. 넷플릭스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해서 DVD의 개당 유통 비용을 기적적인 수준까지 낮춘 유일한 스타트업이었다.


온라인을 통해 주문을 받은 덕분에 고객의 지역 분포와 주문 경향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할 수 있었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유통 방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게 넷플릭스의 진정한 혁신성이다. 하루아침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DVD를 만든 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존 산업의 비효율성을 한 땀 한 땀 개선해나갔다. 스코츠밸리 시절부터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넷플릭스가 보여준 혁신은 늘 이랬다. 



넷플릭스도 동네 만화방처럼 시작했다

1999년 리드 헤이스팅스가 정가를 떠나서 넷플릭스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넷플릭스의 중심지는 스코츠밸리에서 실리콘밸리에 더 가까운 로스 가토스로 옮겨졌다. 넷플릭스가 주류 실리콘밸리에 조금 더 가까워졌단 뜻이었다.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미 이때 실리콘밸리의 스타플레이어였다. 넷플릭스보다 리드의 이름이 더 유명했다. 부시 행정부에서 일했던 변호사를 아버지로 뒀고 대공황 시절 떼돈을 번 전설적인 투자자를 외할아버지로 둔 집안 배경도 무시할 순 없었다. 리드를 스타로 만들어준 건 퓨어아트리아 창업을 통해 거둔 성공 덕분이었다. 프로그램의 오류를 찾아내서 수정해주는 디버그 회사였다. 리드는 퓨어아트리아를 매각해서 7억5000만 달러를 벌었다.

 

넷플릭스는 리드가 창업한 두 번째 회사라는 점 때문에 실리콘밸리의 주목을 받았다. DVD 우편배송이라는 사업 아이템 탓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투자자도 리드 헤이스팅스란 이름을 믿고 호주머니를 열었다. 1999년 넷플릭스를 도왔던 대표적인 초기 투자자는 LVMH의 아르노 회장이었다. 아르노 회장은 자신이 설립한 벤처 투자회사 TCV를 통해 넷플릭스에 3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실리콘밸리의 마이다스의 손이라고 불리는 마이클 모리츠는 “투자하지 않아서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기업이 넷플릭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마이클 모리츠는 <타임>의 벤처 담당 기자 출신이다.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벤처캐피털 세콰이어의 투자심사역을 맡아서 구글과 야후와 페이팔에 투자했다. 모두가 역대급 투자 사례다. 그런 마이클 모리츠도 당시엔 넷플릭스의 미래를 어둡게 봤다. 우편배송이라는 고전적인 사업 방식에다가 블록버스터라는 골리앗까지 버틴 시장 구조 탓이었다. 이런 비관적인 시장 전망 속에서도 아르노 같은 거물의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건 거의 전적으로 리드 헤이스팅스의 개인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로스 가토스에서부터 넷플릭스는 비장의 무기를 갈고닦기 시작한다. 나중에 씨네매치라고 불리게 되는 추천 엔진이다. 컴퓨터가 시청자의 앞선 영화 선택을 기반으로 그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추천하는 기능이었다. 오늘날 넷플릭스의 최대 무기인 취향을 저격하는 인공 지능의 맹아적인 형태다. 사실 넷플릭스가 씨네매치를 개발했던 건 콘텐츠로 사람의 감정을 저격하겠다는 원대한 비전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재고 때문이었다.


모든 종류의 콘텐츠 유통업은 재고와의 싸움이다. 동네 만화방만 가도 알 수 있다. 인기 있는 신작은 없어서 못 빌려주지만 구작은 아무도 찾지 않는 먼지 쌓인 재고다. 게다가 신작도 곧 있으면 구작이 된다. 지금이야 많이 갖다 놓아도 잘 나가지만 찾는 손님이 줄어들면 처치 곤란한 재고가 된다. 그래서 만화방 주인들은 손님들한텐 은근히 구작을 권한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권할 수는 없다. 취향을 알아서 권해주면 좋아하겠다 싶은 단골들이 대상이다. 넷플릭스도 동네 만화방과 똑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 관계를 이용하는 만화방 주인과 달리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접근했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였다.


물론 처음엔 시행착오가 더 많았다. 인간의 취향을 수치화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번엔 <콜레트럴>을 좋아했던 관객이 이번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이런 변덕을 기계가 예측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결국 오늘 밤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고 싶은 관객에게 지난번에 <콜레트럴>을 봤다는 이유로 <인사이더>를 추천하는 오류가 일어났다. 또 영화를 장르나 배우나 길이나 평점 같은 몇 가지 기준으로 분류해놓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 같았다. 솔직힌 이런 시도를 넷플릭스가 맨 먼저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넷플릭스와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그들은 포기했지만 리드와 넷플릭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영화를 분자 단위까지 분석하다

넷플릭스 로스 가토스 본사의 <카우보이 비밥> 회의실에서 만난 토드 옐린 제품 혁신 담당 부사장은 배신자였다. 넷플릭스가 영화 산업의 적이라거나 토드 옐린 부사장이 영화 산업을 넷플릭스에 팔아넘기기라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전통적인 영화 산업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토드의 업무는 불온해 보일 수도 있단 뜻이다.


토드는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영화들을 하나하나 분자 단위까지 분석하는 팀을 이끌고 있다. 공포영화라면 공포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 정해놓고 점수를 매긴다. 다시 말하면 공포영화를 보면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란 감정을 수치화한다는 뜻이다. 로맨스 영화라면 사랑의 감정을 수치화하게 된다. 영화감독이나 영화 평론가나 스크립 슈퍼바이저들로 이뤄진 영화 전문가 집단이 이런 작업을 맡고 있다. 씨네매치를 통해 사용자한테 최적의 영화를 제공하려면 우선 영화부터 분류해야만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감정에 맞춰서 영화를 추천하려면 우선 영화 속 감정부터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토드 자신도 장편 영화 <형제의 그림자>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다큐멘터리 <티벳, 눈 사자의 포효>를 만든 제작자다. 토드는 넷플릭스의 인공 지능이 인식할 수 있도록 영화라는 예술 작품을 디지털화하는 일을 한다. 예술은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 행동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예술가였던 토드가 지금은 예술을 계량화하고 있단 뜻이다. 보수적인 예술 애호가들의 눈엔 넷플릭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이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토드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토드는 한때 한인을 상대로 하는 영어 학원의 강사였다. 한국인들을 상대하는데 능숙하다. “그 얘기를 다 하려면 세 시간은 넘게 걸립니다. 농담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말마다 단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평일엔 열심히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저에겐 창조적인 측면이 있고 동시에 과학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리드가 말한 것처럼 넷플릭스가 과학과 예술이 교차하는 곳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렇게 양면적이다.


토드는 말했다. “기계는 영화를 만들거나 TV쇼의 각본을 쓸 수는 없어요. 감독을 하거나 제작을 할 수도 없죠. 창조는 인간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대신 기계는 인간의 마음을 읽어서 인간이 원하는 감정의 영화를 추천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기계가 인간을 위해 작동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역시 리드가 했던 말과 일맥상통했다.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해 어떻게 쓰일지 늘 고민해왔다”는 얘기 말이다.


토드와 그의 팀은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수만 개의 콘텐츠에 모두 꼬리표를 단다. 영화를 분자 단위로 쪼개서 장면 장면을 넷플릭스가 정한 기준에 맞춰서 태그한다. 얼마나 선정적인지 얼마나 웃긴지를 수치화한다. 넷플릭스의 인공 지능은 이미 계량화된 사용자의 시청 패턴을 알고 있다. 예컨대 이 사람이 7.4만큼 웃기고 8.9만큼 선정적인 영화를 선호한다는 분석이 있다면 정확하게 7.4만큼 웃기고 8.9만큼 선정적인 것으로 분류된 영화를 추천하게 된다. 넷플릭스의 씨네매치의 알고리즘을 거칠게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중요한 건 넷플릭스가 씨네매치의 알고리즘을 십수 년 이상 정교하게 다듬어왔다는 사실이다. DVD 우편배송 시절엔 그저 별점을 매기는 수준이었다. 유명 영화평론가의 영화평에 의존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인공지능을 통해 수많은 사용자 빅데이터와 수많은 콘텐츠 빅데이터를 일대일로 매치시킨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넷플릭스는 사용자와 사용자의 취향 빅데이터도 비교한다. 사람과 콘텐츠를 일대일 매치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취향과 다른 사람의 취향을 매치시킬 수도 있다. 비슷한 배경을 지닌 사람끼리는 기호나 취향이 비슷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른바 협력적 필터링의 방법도 동원된다. 영화를 보고 시청자들이 스스로 평가하고 분류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렇게 쌓인 데이터들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영화들이 분류되고 집단적 취향까지 드러난다. 이렇게 넷플릭스는 지금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산들의 취향 저격 알고리즘을 혁신해왔다. 


인간의 감정을 수치로 풀어내다

결정적인 알고리즘 혁신은 넷플릭스 프라이즈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2006년 리드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의 씨네매치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10퍼센트 이상 올려주는 사람에게 100만 달러의 상금을 수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넷플릭스는 경쟁자들한테 1억 건에 달하는 영화 평범 데이터를 제공했다. 경쟁자들은 이걸 바탕으로 씨네매치 알고리즘을 개선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넷플릭스 프라이즈 경쟁은 당대 IT산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가 됐다.


넷플릭스 프라이즈는 어쩌면 가장 넷플릭스다운 혁신 사례다. 사실 리드는 뛰어난 수학자들을 모아 와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혼돈 그 자체인 인간의 감정을 수식과 수치로 풀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드는 문제를 재정의했다. 단순히 인터넷 기업의 기술의 난제가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인류사적 문제로 재정의했다. 그런 명분을 내걸고 넷플릭스 바깥에서 해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넷플릭스는 특유의 집념을 드러냈다. DVD 유통 시스템을 개선해나갔던 것처럼 수년에 걸쳐서 씨네매치 알고리즘을 꾸준히 개선시켜나갔던 것이다.


넷플릭스 프라이즈는 2009년 7월 여러 엔지니어들의 연합팀 <벨코어의 실용적 혼돈>이 씨네매치 알고리즘의 정확도를 10퍼센트 이상 개선하면서 마무리됐다. 이제 넷플릭스의 씨네매치는 역사상 가장 정교한 취향 저격 인공지능으로 거듭났다. 그때부터 소비자들은 넷플릭스가 애인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걸 넘어서서 나보다 더 나를 더 잘 아는 서비스라고 높이 칭송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 사상 가장 극적인 드라마

2010년 커버스토리에서 <포춘>은 리드 헤이스팅스를 가리켜 실리콘밸리의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블록버스터를 비롯한 강력한 경쟁자들을 하나씩 물리치고 승자의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다윗 넷플릭스가 골리앗 블록버스터를 이긴 건 미국 기업 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 드라마다. 로스 가토스에서 리드 헤이스팅스를 인터뷰할 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1997년 잠시 산호세에 머물 때 블록버스터 체인점에 들를 적이 있다.” 리드는 블록버스터란 이름만 듣고도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파산한 경쟁자의 잊혀진 이름에 대한 본능적이고 감상적인 반응이었다.


넷플릭스가 블록버스터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블록버스터의 실수들 탓도 컸다. 블록버스터는 처음엔 넷플릭스의 위협을 간과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모퉁이에서 등장한 무명의 도전자일 뿐이었다. 블록버스터는 기존 비디오 산업에 기반한 탓에 새로운 미디어인 DVD로의 전환이 늦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블록버스터의 CEO 존 안티오코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DVD를 뛰어넘어서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로 직행하려고 들었다. 온라인 스트리밍이 차세대 기술이 될 거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블록버스터는 너무 성급했다. 1루에서 2루를 거치지 않고 바로 3루로 뛰려고 들었다. 불운도 겹쳤다. 블록버스터의 CEO 존 안티오코는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블록버스터의 내분이 넷플릭스한텐 행운이었다.


그렇더라도 블록버스터의 온라인 사업은 처음엔 분명 위협적이었다. 규모면에선 넷플릭스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다윗 넷플릭스가 골리앗 블록버스터를 이길 수 있었던 건 수년 동안 조금씩 쌓아온 서비스 혁신들 덕분이었다. 한방으로 모든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기존 방식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걸 개선해나가는 작업은 수년에 걸쳐서 지난하게 이뤄지기 마련이다. 넷플릭스는 혁신이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걸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들도 생각한 걸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개선시켜나가는 것이란 걸 보여줘 온 기업이다.


<포춘>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드 헤이스팅스는 한번 문 혁신의 가능성을 절대 놓지 않는 도베르만 같은 짐승 CEO다. 경쟁자들이 혁신을 멈춘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에서 리드의 혁신은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씨네매치 알고리즘을 혁신할 때도 리드는 더 이상 혁신이 불가능하다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게 지금의 넷플릭스를 만들었다.




앞으로 <이노베이터> 매거진에는 매주 월, 화요일에 혁신경영인과 혁신기업에 관한 인사이트를 연재합니다. 다음화도 기대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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