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구축(驅逐)

이제는 우리말의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차례

by 인사이트뱅크
우리말 속에 섞여있는 한자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이고 다듬어진 생각의 구조이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단어의 뿌리를 이해하는 순간, 사고는 정제되고 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표현은 질이 나쁜 것이 질 좋은 것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로 조직에서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떠나고 요령과 줄서기에 능한 비핵심 인력들만 남을 때, 시장에서 품질이 좋은 물건보다 오히려 값싼 물건이 기준이 되어버릴 때 우리는 이 말을 꺼내 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곱씹어 보면 묘한 어색함이 남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자주 들어온 탓에 문장의 뜻은 대략이라도 짐작할 수 있지만, 정작 ‘악화’, ‘양화’, ‘구축’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묻는다면 주저하게 됩니다. 문장은 익숙하지만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은 낯선 까닭입니다.

이 말은 원래 경제학 용어에서 출발했습니다. 금화나 은화가 유통되던 시절, 액면가는 같지만 함량 차이로 가치가 다른 화폐가 존재하자 사람들은 함량이 높은 돈[양화(良貨)]은 숨기고, 가치가 떨어지는 돈[악화(惡貨)]을 먼저 내놓았습니다. 그 결과 시중에는 좋은 돈 대신 나쁜 돈만 돌아다니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지폐 등 현금을 사용하는 빈도가 확실히 줄었지만, 지갑에는 새 돈을 넣어두고 으레 헌 돈을 먼저 꺼내 쓰던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공감이 될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 것이 바로 ‘그레셤의 법칙’입니다. 이 문장의 영어 표현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오히려 한자어로 된 우리말보다 영어 쪽이 더 직관적으로 다가옵니다. bad money와 good money 자리에 위에서 말한 ‘헌 돈’, ‘새 돈’이나 ‘나쁜 돈’, ‘좋은 돈’ 정도로 풀어써도 의미 전달에는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구축’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축’하면 흔히 어떤 시설을 쌓아 올리거나 체제를 세운다는 뜻의 구축(構築)을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문장에 이 한자어를 대입하면 의미가 갑자기 엉뚱해집니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구축’은 전혀 다른 의미의 한자어 ‘구축(驅逐)’입니다. 바로 ‘어떤 세력이나 대상을 몰아내고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사실 구축(驅逐)이라는 단어는 생소하지만 ‘구축함(驅逐艦)’을 떠올리면 이해가 한결 쉬워집니다. 어뢰 등을 무기로 삼아 적의 주력함이나 잠수함을 빠르게 추격하고 몰아내는 군함이 바로 구축함이지요.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헌 돈이 새 돈을 몰아낸다’거나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밀어내는 꼴’ 정도로 쉽게 풀어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굳이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어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근대 이후 서구의 여러 이론과 개념이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나 고민 없이 유통되며 그대로 굳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는 이렇듯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존재합니다. 양화가 자리 잡기도 전에 악화가 먼저 들어온 셈이지만, 이제는 우리말의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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