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_진상(進上)

소비자가 왕이 된 시대의 명암

by 인사이트뱅크
우리말 속에 섞여있는 한자어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이고 다듬어진 생각의 구조이자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단어의 뿌리를 이해하는 순간, 사고는 정제되고 말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저 손님 완전 진상이야.

대개 한숨과 함께 내뱉게 되는 ‘진상’이라는 말은, 예의 없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본뜻을 떠올리면, 잠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진상(進上)은 ‘나아갈 진(進)’과 ‘윗 상(上)’으로 이루어진 한자어입니다. ‘임금님께 진상하던 임금님표 이천쌀’할 때 사용하는 그 진상과 같은 한자어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진상을 찾아보면 같은 표제어에 전혀 상반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진상의 첫 번째 의미는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침’이고, 두 번째 의미는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어쩌다 이처럼 극과 극의 의미가 한 단어 안에 공존하게 된 것일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각 지방의 귀한 특산물을 궁궐로 올리는 일을 ‘진상하다’라고 했습니다. 제주에서는 귤과 전복, 말이, 전라도에서는 쌀과 녹차, 김이 올라왔고, 경상도의 베와 곶감, 강원도의 송이와 녹용, 북방의 모피와 매까지 각 고장의 산물이 한양을 향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납품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과 산업, 그리고 충성과 질서를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말 그대로 조선의 산과 바다, 들판이 응축된 귀하고 좋은 것을 ‘위로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귀하고 좋은 물건을 가리키던 말이, 어쩌다 오늘날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을 뜻하는 표현으로까지 변하게 되었을까요.

정확한 변이의 경로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의미의 기울기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래 진상은 백성들이 정성을 다해 임금에게 고장의 귀한 물건을 올리던 지극한 예우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도는 변질되었습니다. 중간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고, 규격에 맞지 않는다며 억지로 퇴짜를 놓는 이른바 ‘방납’의 폐단이 나타나자, 진상은 더 이상 영광스럽고 충성스러운 의례가 아니라 백성들의 원망을 사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산품의 허점을 잡아 까다롭게 굴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관리들의 행태가 ‘진상 부리다’라는 표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결국 귀한 것을 올리던 행위를 뜻하는 말이, 상식 밖의 요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기울게 된 것입니다. 위로 향하던 긍정적인 의미의 언어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느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언어의 변화 속에도 시대의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왕이 군림하던 시대에서, 소비자가 왕인 시대로 전이되면서 ‘요구’의 성격도 달라졌습니다. 권위를 향해 울며 겨자 먹기로 올리던 물건이, 이제는 소비자의 과도한 서비스와 보상에 대응하는 ‘감정 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의 방향과 대상이 달라진 만큼, 사회 구조와 질서도 달라진 셈입니다. 본래의 좋은 의미와 달리 진상은 예나 지금이나 늘 피하고 싶은 단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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