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노을을 보듯 살 수 있다면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by 이수정

지난날의 아쉬움이 남은 날의 설렘보다 크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뜻일 거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 속에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정보다는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의무가 더 많아졌다면 이 또한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뜻일 거고.

흥미롭지 않지만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 그렇다. 밥벌이를 위해 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자리. 모인 사람들의 관계가 서먹하지도 그러나 마음이 온전히 통하지도 않는 상황에 몸마저 피곤하다면 그런 모임에서 자리를 지키는 자신의 모습이 영 마뜩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과감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도 없으니 스스로가 선택한 고역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모임에 참석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맥주 한 잔을 만지작 거리며 시큰둥하게 앉아있던 나의 앞에 앉은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제가 아는 분이 있는데요, 친구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이 병원에 갔다 오시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데요. 너무 갑작스러워 주변에 계신 분들이 모두 패닉 상태예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마지막을 몰랐을 텐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변의 누구도 준비할 새 없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 있구나. 너무도 생경했다. 그리고 그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그 누구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눈 맞추고 싶지 않았지만 피할 수 도 없는 사실이었다.

어쩜 지금 이 자리의 사람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람들 일 수도 있겠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딱하게 다리를 꼬고 데면데면하게 시간을 보내는 지금의 모습을 마지막일지도 모를 내 모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허리를 세우고 테이블 앞으로 몸을 기울여 앞쪽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이야기들을 더 귀담아 들었고 열심히 반응했다. 눈을 마주치고 질문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짓고 손뼉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 순간을 소중하게 만들고 싶었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에 탄력이 붙었다. 어느새 모임이 끝났고 나도 모르는 풍요로움이 가슴에 차 있었다.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은 없겠구나. 우리가 즐겨야 할 시간은 지금이구나. 지금에 온전히 몰입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구나.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후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의 외할머니가 큰 수술을 받고 입원해 계셨던 병실에는 서쪽으로 큰 창이 나 있었는데 일몰이 아름다웠단다. 6인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들 모두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었는데 대부분 위중한 병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의 저녁식사를 수발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가다가 서쪽을 향해 앉아있는 할머니들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외 할머니와 수술 후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모습에 갈 때가 되었다고 자주 말씀하시던 한 할머니, 암 제거를 위해 개복을 했지만 너무 많은 부위로 전이가 돼 손도 못쓰고 다시 닫아야 했던 또 다른 할머니 세 분이 비슷한 자세로 똑같이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단다.

할머니들은 오늘따라 노을이 예쁘다 하시면서 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을 바라보고만 계셨는데, 마치 생애 마지막 노을 구경을 하는 듯 정성을 다해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선 생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숙연한 평화로움을 보았다고 했다.


변함없이 뜨고 지는 태양과 매일 반복되는 설거지, 가끔은 지루하게 부딪히는 맥주잔마저도 내 '삶'의 증거임을 내가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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