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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Feb 24. 2019

자만심보다 지나친 겸손이 문제인 사람들

이카루스가 너무 높게 날아서 문제라고?


몇 년 전 겨울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내가 여행 중인걸 몰랐던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꽃을 머리에 꽂은 사진을 답장으로 보냈더니 자신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인데, 지하철 안의 한국은 온통 검은색이란다. 


우중충한 옷에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이 지하철 안에 가득하다며 필리핀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 시간에 한국에 있었다면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색이었을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겨울옷들. 검은색 오리털 파카, 짙은 감색 모직 롱코트,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두툼한 스웨터, 진회색의 타탄체크 코트... 아! 딱 한벌, 짙은 핑크색의 코트가 있다. 입고 나갔던 날보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시간이 더 길었던 코트. 그 핑크 코트를 입고 나간 날엔 어김없이 누군가가 코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는 "코트 색깔이 참 이쁘네요"라고 했지만, "참 과감한 색깔의 옷을 입었네"라고 말하는 듯했고,  또 누군가는 "어머! 짙은 핑크가 잘 어울리네요...라고 말하더니 바로 나지막이 "난 그렇게 튀는 색은 못 입겠더라."라고 했다. 


내가 어릴 적 어른들이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그리고 덧붙여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아이들이 추구해야 하는 지상 최대의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얌전히 있어라.",  "나서지 마라.", "겸손해라."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배우며 자란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보편적 통념을 대부분의 상황에 적용시켜 자신의 행동 패턴을 정해왔다. 


첫 직장에서 만난 선배는 내게 '너무 앞서지도, 그렇다고 너무 뒤떨어지지도 않는 적당한 중간 상태를 고수할 것. 너무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말 것, 괜히 아이디어를 내거나 열정적으로 보이지 말 것'이라는 자신의 노하우를 전하며 엄청난 선배노릇을 한 양 으쓱거렸었다. 


굳이 선배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나는 내 의견을 너무 내세우지도 않았고, 어떤 경쟁에도 굳이 상대를 이기려 하지도 않았다. 매 순간 튀지 않는 그저 그런 중간 정도의 상태로 누구에게나 '사람 좋은' 이란 평가를 받았던 나, 그런 나는 어느새 내가 나를 지켜야 할 순간마저도 그저 중간만을 고수한 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착한 사람! 그런데 그게 환상이더라.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고, 그것은 타인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환상이었다. 불혹을 넘어서는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짜 고민을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가 아니라 가만있었기에 중간밖에 못 간 것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착한 사람, 인간성 좋은 사람, 마음 넓은 사람, 이해심 깊은 사람으로 살아오느라고 진짜 내 모습을 버리고 살아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인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인용하는 이론이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루프트(Josept Luft)와 해리 잉햄(Harry Ingham)이 만든 '조해리의 창'이다. 


그 이론에 의하면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인 4개의 창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이 알고 상대도 아는 영역인 '열린 창', 자신을 알고 있지만 상대에게는 숨기고 있는 영역인 '숨겨진 창', 자신은 모르나 상대는 관찰할 수 있는 영역의 '보이지 않는 창', 자신도 상대도 알지 못하는 영역인 '암흑의 창'이다. 


대인관계의 향상을 위해서는 '열린 창'의 영역을 넓히고, '보이지 않는 창'의 이해를 위해 자신에 대한 타인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열린 창이나 숨겨진 창, 보이지 않는 창은 자신, 혹은 타인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전제하기에 얼마든지 의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암흑의 창'영역은 말 그대로 미지의 부분이다.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렇기에 타인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 그런데 이 미지의 영역이야 말로 개인의 정체정을 구성하는 가장 큰 영역이 아닐까? 흔히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빙산에 비유하곤 한다.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 빙산은 수면 밑의 빙산에 비하여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조해리의 창에서 표현하는 인식상의 3개 영역은 수면 위로 올라와 있는 빙산이고, 암흑의 창은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빙산인 것이다. 나조차도 모르는 나에 의해 내가 아는 나, 타인이 아는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는 나로 사는 일이 당연하다 싶겠지만, 나는 알지만 타인이 모르는 나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싶겠지만, 또한 나는 몰랐지만 타인이 아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암흑의 창에 사는 나를 만나는 일이다. 


나 조차도 몰랐던 나와 이야기 하기, 암흑의 창에 사는 나와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은 어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아닐까? 왜냐하면 내가 아는 나는 내가 모르는 나에 의해 조종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카루스는 다이달로스와 미노스 왕의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다이달로스는 뛰어난 건축가, 조각가, 발명가로 손재주가 남달랐다. 미노스 왕의 왕비가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 미노타우르스를 가두기 위한 미로를 만든 사람도 다이달로스였다. 그러나 왕비의 간음을 방조했다는 사실이 미노스 왕에게 알려지자 그의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손재주가 좋았던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서 미궁을 탈출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당부한다. 태양 가까이 날지 말 것, 그리고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무 높게 날 경우 태양에 의해 밀랍이 녹을 것이고 너무 낮게 날 경우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카루스는 하늘을 난다는 것에 도취되어 너무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날개를 만들었던 밀랍이 녹아 바다에 떨어져 죽게 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이카루스의 이야기를 자만의 부정적 측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카루스가 너무 낮게 날아 바닷물에 날개가 젖어 빠져 죽었다면 그 이야기는 어떤 교훈을 주며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너무 높이 나는 자만심이 인간을 망치는 태도라면 너무 낮게 나는 지나친 겸손 또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자만심, 즉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행위는 함께 사는 세상에서 지양해야 할 태도였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 무리에서 튀지 않고 편하고 안전한 영역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배워왔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통해 전해 내려 온 관념은 우리의 암흑의 창 영역에 깊이 새겨졌을 거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그 암흑의 영역을 기반으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중간밖에 못 간다. 나의 경우 자만심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친 겸손이 문제다.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어째서 지금의 나일까? 진짜 나의 모습은 무엇일까?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실 자신과 소통할 줄 모르는, 아니 소통해본 적 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소통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것인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낮게 날았던 나는 훨씬 높은 곳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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