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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16. 2018

시간이란 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진실의 베일을 벗기다

"아빠, 우리가 모르는 진실의 절반을 볼 순 없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우리는 앞만 보고 있으니 뒤를 볼 수 없잖아요. 그러니 진실의 절반만 보는 거죠."


8살 양양은 아빠로부터 카메라를 선물 받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18년 만에 한국에서 재개봉하는 대만의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의 한 장면이다.

2000년 <하나 그리고 둘>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에드워드 양 감독은 모든 사람이 가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진실의 절반'을 어린 주인공 양양이 찍는 사진을 통해 이야기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진실'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서 찾았다면 중세부터 18세기까지의 유럽 화가들은 진실, 정의, 절제, 시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해서 캔버스에 담았다. (이런 방식을 우의화(寓意畵, allegory)라고 한다.)                                                


진실이란 개념은 '베일에 가려진 여신'으로 의인화되었는데, 진실의 여신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함께 등장한다. 크로노스는 날개를 달고 있는 노인으로 표현되고 크로노스의 지물인 거대한 낫과 모래시계는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결국 파괴된다는 시간의 속성을 상징한다.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시간>,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1679년~1752), 프랑스, 1733년,  캔버스에 유채, 203 x 208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장 프랑수아 드 트루아의 <진실의 베일을 벗기는 시간 Time unveiling truth>에는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진실의 여신이 큰 낫을 든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 의해 베일을 벗겨지며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왼손으로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 있고 화면의 왼편으론 환희에 찬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보는 네 명의 여성이 있는데 이들은 고대 철학에서 4대 덕목으로 꼽았던 용기(fortitude), 정의(justice), 절제(temperance), 신중(prudence)의 의인상이다. 사자에 기댄 여인은 용기를, 검(권력)과 저울(공평)을 들고 있는 여인은 정의를, 물병을 든 여인은 절제를 의미하며 신중은 뱀을 들고 있는데 그녀의 지혜에 대한 암시다.


                                                                                                                                                                            

진실은 항상 거짓과 기만 그리고 계략의 횡포 속에서 자신을 베일에 가린 채 숨어있다. 그러나 시간은 그 베일을 벗겨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낼까? 드 트루와는 이 과정에 용기와 정의, 절제와 신중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거짓과 질투로 부터 진실을 구하는 시간> 프랑수아 르무안(1688~1737), 프랑스, 제작년도: 17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부쉐 드 페르트 미술관


프랑수아 르무안의 <거짓과 질투로부터 진실을 구하는 시간>은 진실이 근본적으로 가진 취약함을 잘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진실은 늘 거짓과 질투의 검은 장막에 가리어져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강력한 힘이 거짓과 위선으로부터 진실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들고 있는 얼굴 가면은 드 트루아의 작품에도 나왔듯 거짓과 위선을 의미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급해진다. 조급함은 내 선택의 옳고 그름을 빠르게 결단 내고 싶어 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시간의 도움을 받아야만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듯 우리가 선택하는 많은 일들도 시간이라는 약의 처방을 받고 용기와 절제, 신중의 응원을 받아야만 참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더!

베일을 쓴 진실의 알레고리는 노벨상의 메달의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의 메달 뒷면에는 자연의 여신과 과학의 여신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손엔 풍요의 뿔을 들었지만 베일 속에 진실을 감추고 있는 자연의 여신은 진실 혹은 자연의 원칙을 말하고, 그 옆으로 베일을 걷어내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과학의 여신은 지적 호기심으로 자연의 원칙을 밝혀내려는 과학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다. (그 외 노벨 의학상,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의 메달의 디자인은 모두 다르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메달의 뒷면, 아인슈타인의 메달이다. 아래쪽에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오늘도 나는 캔버스에 담긴 진실의 여신과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보며 가빠진 숨을 잠시 고른다. 바삐 움직이는 세상, 그 안에서 정신없이 달리고 있던 나도 세상이 만들어놓은 거짓과 위선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하고 눈뜬장님 마냥 그저 허위허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늘 그렇듯 힘든 삶이지만 여전히 그렇듯 그림은 나를 위로해준다.


시간을 쌓아야만 그 진실이 의미 있어진다.

결. 국. 시. 간. 이. 약. 이. 다.



빨리-많이-대충 에서 천천히-깊게-대화하는 여행을 만들어주는... 그림 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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