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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r 22. 2019

미래지향이라는 알량한 착각

지금을 망친 건 바로 나였어

직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 오전부터 시작된 회의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안 보이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밥은 먹게 해 주겠지라는 생각들을 하는지 슬쩍 눈치를 보며 다이어리를 덮거나, 인쇄물들을 정리하며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다. 


팀장은 산만해진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지속할 수 없어 "자 그럼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는 걸로 하고..."라고 말끝을 흐리며 팀원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혹여라도 점심시간을 단축시키는 대역죄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눈치를 보며 다른 이들에게도 입을 열지 말라는 보일 듯 말듯한 압박의 표정을 짓는다.


팀원 A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옛날 팀장님은 회의를 이렇게 질질 끌게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팀장님이 리더십이 있긴 있었어'


팀원 B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흐지부지 회의가 끝나면 다음 회의 땐 더 혼란스러워질 텐데, 적어도 다음 회의 때까지 각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아! 정말 짜증 나'


팀원 C는 속으로 생각한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회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나저나 오늘 점심으론 뭘 먹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이 지향하는 시제가 있다. A는 자신의 시제를 과거에 두고, B는 미래에 둔다. C는 현재에 둔 유형이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이 축적해온 삶의 방식이 일종의 패턴을 형성하고 다양한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또한 100% 자신이 지향하는 시제에만 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절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왔다 갔다 한다. 


나는 팀원 B와 같은 유형이다. 나의 시제는 거의 미래에 가있다. 회의를 마칠 땐 꼭 다음 회의에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속이 시원하다. 누군가 자꾸 이미 벌어진 일에 논의의 중점을 두고자 하면 나는 이미 벌어진 일은 원인을 분석하는 정도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얼른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지에 에너지를 쏟아부어 준비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는 매우 미래지향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나는 매우 미래지향적이다. 미래 지향적이다 못해 미래를 미리 당겨와 지금을 산다.


예를 들어 휴가를 가는 날, 나는 목적지로 가는 차 안에 앉아 휴가가 끝나 다시 돌아올 걱정을 한다. 


'휴가 마치고 돌아오면 후유증이 심할 텐데... 다시 일의 리듬을 찾으려면 오래 걸릴 텐데... 휴가가 끝나고 나면 곧 겨울이 다가올 텐데...'


이건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미래의 모든 걱정을 미리 끌어모아 끙끙 앓는 바보 중에서도 상 바보가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나이 먹을수록 의무와 책임이 많아지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드는데, 왜 나는 지금이 아닌 미래의 고민까지 끌고 와 지금을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걸까?


끊임없이 나는 지금의 나와 투쟁하며 살아왔다. 내가 온전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제일 방해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과거가 후회스러워서, 미래엔 그럴듯하게 살고 싶어서, 그렇지만 그럴 확신이 없어서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미래의 불안을 지금으로 끌고 와 열심히 고뇌하며 살아가는 일중독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후배가 카톡을 보내왔다. 나와 나누고 싶은 글이라 했다. 그녀가 근래에 감동적으로 본 드라마의 주인공이 엔딩에 한 대사라고 했다. 


그 드라마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시간을 주무르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시간 앞에서 아등바등거리기만 한 여자. 누구보다 찬란한 시간을 가졌음에도, 시간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남자. 같은 시간 속에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지닌 두 사람의 이야기"라는 소개가 나온다. 


시간여행에 관한 판타지 드라마처럼 시작했지만 사실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였다.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이 마지막에 남긴 내레이션은 지금의 나에게 엄청난 위로를 주었다. 

미래지향이라는 알량한 착각 속에 사는 나의 허울을 쨍하고 깨뜨려 주는 부드럽고 단단한 대사였다.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의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라.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더 이상 오늘을 망치지 말고 살자! 난 그럴 자격이 있다. 내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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