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정 Mar 20. 2019

나이 50에 핑크공주라니요.

나도 몰랐던 나의 분홍 애호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열람실로 돌아온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나의 소지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메탈 핑크 컬러의 노트북, 분홍 텀블러, 분홍 테의 돋보기, 분홍 필통...


우연하게 조합된 이 광경을 보니, 얼마 전 스쳐 지나며 보았던 TV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배우 유인나가 출연하는 드라마 '진심이 닿다'의 주인공 '오진심'이라는 캐릭터의 책상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훗' 하고 웃어넘겼는데, 나의 책상이 마치 '오진심'의 책상과 비슷하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나... 나, 분홍색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책상만 닮지 말고 외모를 닮았으면...


정말 몰랐다. 내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내가 좋아하는 색은 초록, 파랑, 보라 정도라고 지금껏 알고 살아왔는데, 갑작스럽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내가 정말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얼마 전까지 가지고 다니던 노트북 가방이었다. 유인나 배우가 안고 있는 쿠션과 같은 색상의 가방이었다. 너무 낡아져서 얼마 전 검은 노트북 가방으로 바꿨지만 아직도 도도한 모습으로 책장 한편에 놓여 있다. 


가만있어보자, 연 분홍색 페이크 퍼 코트가 있고,
진한 핑크의 모직 코트가 있었지. 재킷도 진한 핑크, 연보라색에 가까운 핑크,
정장용 바지도 짙은 핑크, 연한 핑크 두 벌이나,
어머머... 카디건도 진한 핑크, 연한 핑크...
어머머 웬일이니... 나 핑크 홀릭인가 봐!


눈에  보이는 핑크만 골라보았다. 정말 저런 옷을 입고 다니냐고? 강의할 때만 입는다. 연한 베이지처럼 보이는 가방도 사진상 그렇지 실제론 탁한 핑크


문제는 뭐냐 하면 난 한 번도 내가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 모임에서도 내 앞에 앉아있던 지인이 내게 "어머 수정 씨, 오늘 입은 연보라색 니트와 머플러가 참 잘 어울린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분홍색을 좋아한다.



저녁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분홍색을 좋아하면서도 왜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을까? 색에 대한 감각이 둔감해서? 아니다. 나는 디자인과 출신이고 지금도 사이드 잡으로 디자인 일을 간간히 하고 있다. 그럼 왜? 참으로 어이없어 보이는 이 질문은 나를 20여 년 전의 어느 날로 데리고 갔다. 


20여 년 전 한국에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분야의 컨설팅이 막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미지 메이킹에서는 타고난 개인의 신체 컬러를 4가지 계절의 색상으로 진단하고 이를 기반으로 외모를 연출하는 퍼스널 컬러라는 분야가 있었는데, 심리학자 캐럴 잭슨(Carole Jackson, 1932~)의 <컬러 미 뷰티풀(Color Me Beautiful)>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 이론에 연관된 책들을 모아서 읽던 중 '색채 심리'에 관련된 번역서를 보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책의 제목과 저자는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한 토막이 있다.


책은  색채의 유래, 색채가 주는 심리적 속성, 마케팅 사례 등등을 각각의 색상별로 나누어 실어놓았었는데 분홍색을 소개하는 파트의 말미에 '분홍색은 여성이 이혼 법정에 서게 될 경우 입으면 좋을만한 색'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이유인즉 분홍색은 여성을 연약해 보이게 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색상이어서 위자료 협상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어이상실  20년 전에 읽었던 번역서였기에 우리나라와 정서가 달라서 그런가? 하고 넘겼지만, 아직도 그 내용이 생생한 건 그만큼 나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해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내 의식과 무의식의 협의한 부분이다. 나는 나 잘난 맛으로 산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런 내가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것은 적어도 그 책에 의하면 나는 약하고,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비칠 개연성이 많은 사람인것이다. 그런 도식이 성립되자 나는 의식적으로 내가 분홍색을 좋아한다는 인식을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햄릿은 알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