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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r 27. 2019

천국에선 거짓말하지 말자.

그 시절 우리의 클럽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거기서 눌러앉은 친구가 한국에 나왔다. 

당시 내가 살던 홍대 앞은 락카페의 유행이 저물어가며 레개 바가 슬슬 생겨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건너 건너 친구 뻘 되던 사람이 홍대 앞에 레개 바를 오픈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늘 북적북적했던 그 바는 특히 자정이 되어가면 홍대 앞에서 좀 논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상징적인 곳이었는데, 넘쳐나던 열정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비슷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모여 한 손엔 병맥주를 다른 한 손엔 새우깡 그릇을 들고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즐기게 해주는 우리들의 낙원 같은 곳이었다. 그 바의 이름은 '헤븐 heaven' 


그곳에는 한국사람,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사람, 자메이카 사람들까지 저마다의 언어들로 소리 높여 이야기했고 그 생소한 단어들은 심장까지 쿵쿵거리며 전해오던 커다란 비트 소리에 섞여 어떻게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이해되어 전달되었다. 


헤븐이 막 오픈한 이른 시간, 미국서 온 친구와 나는 헤븐의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간만의 회포를 풀고 있었다. 밥 말리의 '노 워먼 노 크라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고등학교 절친이었던 우리는 20대 중반이 되어 만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정신없이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내가 친구에게 영어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한참 재미 붙인 영어 회화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내가 얼른 미국에 와서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노래를 하던 친구도 좋은 생각이라며 영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무러 익어가고 우리의 얼굴도 불그스레 익어가기 시작할 때 두 명의 남자 손님이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았다. 학생 같아 보였다. 복학생. 흘깃흘깃 우리를 바라보던 두 남학생은 우리에게 합석을 하자고 했다. 착하고 순진하게 생긴 친구들이었다. 내 친구가 우리 일행이 곧 도착할 거라고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다. 그럼 그때까지만이라도 맥주 한 잔 같이 하자고 한다. 사이사이 내 친구는 나에게 영어로 이야기를 계속하고, 나는 관심 없는 듯 내 친구와의 수다가 재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중 한 남학생이 

"이 분은 한국말을 못 하시나 봐요" 한다.


내 친구는 

"네, 얘는 한국사람 아니에요"


남학생은 

" 아, 그러시구나.... 음.... 저.... 저기... 하... 하이~ 하우 아 유! 아니... 하우 두 유두 인가?"


너무나도 정직한 발음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아... 이거 뭐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렇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최대한 굴린 발음으로


'하이~'했다.


그 사이 내 친구의 얼굴에 웃음과 난처함과 장난기가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내 친구는 다시 정중하게 

"제가 친구랑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저희 둘이 시간을 갖고 싶으니 즐겁게 마시고 가셔요~"라고 친구의 트레이드 마크인 얼굴의 보조개를 날리며 실드를 쳤다.


"아. 네, 실례했습니다. 그럼..."


그 후 나는 친구의 영어가 이해되지 않아도 무조건 


"아하!", "오~", "오 마이 갓", "뤼얼리?", "왓?" "원 모어", "아이돈노"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발음에 신경 써가며.


맥주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취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일어나는 남학생 둘. 출입구를 향해 걸어 나간다.


나는 '휴~'하고 한숨을 쉬며 이제 살겠다는 표정으로 내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앉았던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어? 어?" 한다.


출입구로 나가던 남학생 중 한 명이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나는 갑자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미 나를 본 적이 있는데 이제 생각난 걸까? 우리 학교 학생일까? 내일 당장 학교 앞에서라도 마주치면 어떡하지? 아! 거짓말하는 게 아니었어...' 


내 등 뒤로 다가온 남학생이 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아! 망했다. 어떡해...' 죄지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대한 젠틀한 얼굴로 그리고 매우 정직한 발음으로 나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유유히 걸어 나간다.


"저... 음... 해부 어 굿 타임"


25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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