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늙었다. 믿고싶지 않지만

그래도 내겐 여전히 거대한 아빠

by 이수정

완벽한 토요일이었다.


나의 미술사 강연과 샹송 콘서트의 컬래버레이션.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와 우리나라 최고의 샹송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모처럼 토요일 오후를 새로운 경험으로 채우고 싶었던 청중들의 마음속에 인상 깊게 남겨졌을 것이다.


사위를 포함한 6명의 가족이 매달 가족모임을 하는데, 다음 달부터는 무조건 이 모임에 오겠노라고 도장 쾅 찍고 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본인 회사 상사를 모시고 와야겠다고 하신 분, 고등학교 동창 모임은 꼭 이곳에서 해야겠다고 하신 분등, 대부분 다음 공연을 기약하고 돌아간 것으로 보아 40여 명 남짓한 모든 분들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한 듯하여 뿌듯하였다.


그림과 노래, 두 가지의 협연이 특히 좋았다고 한다. 어떤 형식으로 진행이 될지 궁금했는데, 이런 식으로도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했다. 그림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었는지 몰랐다고 두 엄지 치켜세워주시고, 자신의 다른 모임에 초청하고 싶다 하신 분들까지 다행히도 그림과 노래의 컬래버레이션은 성공적인 콘텐츠로 탄생하였다.


나는 특히 처음으로 나의 강연장에 모신 아빠와 엄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본 것이 가장 즐거웠다. 엄마는 노래를 듣다가 그만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했고, 무뚝뚝하신 아빠는 샹송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동영상을 찍으시며 집중하셨다.


공식적인 시간이 끝나고 행사의 주최자와 가까운 지인들만이 남아 뒤풀이를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공연장소였던 갤러리의 관장님께서는 아끼는 와인을 꺼내오셨고, 뒤이어 하이난의 명물인 코코넛 술과 몇 가지의 술이 더 나왔다. 엄마와 아빠는 뒷정리를 해야 했던 나와 모임의 기획자인 동생을 기다리시느라 얼떨결에 뒤풀이에 합석하게 되셨다.


춘천의 M방송국의 성우이자 DJ인 지인이 뒷마무리를 도와주다가 함께 뒤풀이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유쾌함과 달변은 뒤풀이 자리를 더욱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그녀가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버님. 아버님은 따님이 이렇게 진행하는 강연에는 처음 와보신 거잖아요? 어머니는 따님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이 많았을 테니, 저는 아버님께서 오늘 참석하셔서 따님의 모습을 보신 소감이 정말 궁금해요. 한 마디만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자리에 있던 열명 남짓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아빠에게 쏠렸다.


"아... 네... 허허" 하며 겸연쩍은 미소와 함꼐 말끝을 흐리시는 아빠


워낙 무뚝뚝한 아빠라 그런 상황 자체를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끼어들어서


"울 아빠가 워낙 무뚝뚝하셔서, 이런 게 좀 부담스러우실 것 같아요. 호호호!! 자~ 자~ 건배하시죠?"


질문을 했던 지인이 조금 당황스러워하면서


"어머, 아버님! 제 질문... 까인 거예요? 하하하"


아빠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며


"아... 예..." 하고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나는 속으로 뭐 한 말씀만 하셔도 될 텐데, 딸내미 모습이 자랑스럽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 즐거웠다 아니면 다들 이렇게 도와주셔서 오늘 좋은 시간 만든 것 같다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며 무뚝뚝한 아빠의 모습에 살짝 심통이 났다.


그 사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다시 우리는 잔을 부딪히며 모 방송국의 로고송을 개사한 "만나면 좋은 친구 우우우~ "라고 노래하며 초등학생들처럼 낄낄거렸다.


나와 동생은 엄마와 아빠를 모시고 친정집으로 가서 우리끼리 조촐하게 2차를 했다. 운전 때문에 술을 못 마셨던 동생을 위해서였기도 했고, 딸 둘이 진행한 행사에 대한 엄마 아빠의 소감이 듣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모처럼 딱 우리식구 넷 만 모인 시간 이었다.


소주와 맥주, 집 앞 횟집에서 사 온 광어와 우럭을 놓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잔을 부딪혔다.


그러다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아빠에게 왜 한 마디라도 하지 그러셨냐고 타박을 하려는데 아빠가 말씀하신다.


"내가 요즘엔 사람들 말이 잘 안 들려, 아까 그 친구가 뭐라고 하는데... 소리는 들리는데 내용이 웅웅 거려... 가까이 있으면 괜찮은데, 좀 떨어져 있으면 무슨 말인지 당최..."


아빠가 겸연쩍게 "아... 네" 했던 것은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하...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했던 아빠가 귀가 안 들릴만큼 늙으셨다니. 하긴 나이 80이니 늙으신 게 맞다. 몇 년 전부터 보청기를 끼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 아빠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우리 가족을 이끌어 나가는 대장이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말하는 상대의 소리가 안 들려 답을 얼버무리고, 스스로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애써 미소를 지어야 하다니, 그런 아빠의 모습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픈 거다.


속상함을 들킬까 봐 맥주 한 잔을 쭈욱 들이키고 고개를 숙여 괜히 광어회 한 점을 고추장에 넣었다 뺐다 하는데 아빠가 동생에게 말을 한다.


"언니가... 그 사이 많이 발전했어... "


그때였다. 정신없던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이 완벽해진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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