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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01. 2019

당신의 낭만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티뇰의 아틀리에>속 나의 낭만

낭만이라...


최백호 아저씨의 낭만은 '비어 있는 가슴 한 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고

체리필터의 낭만은 '가난하고 서러워도 훔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제이래빗의 낭만은 '춤과 음악이 넘치는 잔잔한 호숫가 싱그런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길 펜더에게 낭만이란 1920년대의 비 오는 파리였다.


미국의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인 길은 1920년대의 파리야 말로 가장 완벽한 시공간이라고 여긴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자신은 시대를 잘못 골라 태어났다고 생각하던 그는 마침 예비 장인의 파리 출장에 약혼녀와 함께 동행하게 된다. 쇼핑에만 정신이 팔린 약혼녀와 달리 파리의 예술적 풍취에 흠뻑 빠져 1920년대 비 오는 파리의 낭만 속에서 살고 싶다고 약혼녀에게 말하지만 그녀는 길의 낭만적인 꿈을 현실도피형 '황금시대 콤플렉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좀처럼 자신의 감성을 이해 못하는 약혼녀의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파리 시내를 배회하던 길은 자정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오래된 푸조 자동차에 오르게 되고 그때부터 1920년대와 189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며 그 시대의 문인들과 화가, 음악가들과 함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꼽는 최고의 낭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이야기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길에게 다가오는 타임머신 같은 자동차 <영화 Midnight in Paris>


영화를 보는 내내 어찌나 마음이 설레고 흥분되던지, 마치 내가 길이 되어 헤밍웨이, 피카소, 루이스 브뉘엘, 만 레이를 만나는 것 같았고, 살바도르 달리가 나오자 그만 빵 터져버렸다. 완벽한 캐스팅!


그런데 나 또한 길과 비슷한 경험을 현실에서 한 적이 있었으니, 바로 오르세 미술관에서 만난 앙리 팡탱 라투르의 <바티뇰의 아틀리에>에 앞에 선 순간이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을 자세히 보지 않고 지나갔을 확률이 높다. 오르세 미술관엔 이 그림 말고도 유명한 그림들이 훨씬 많으니까. 그러나 난 이 그림 앞에서 한 참을 서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아~~~, 너무 좋다" 를 나즈막히 외치자 머리속에 빙글빙글 회오리가 생기며 150여년 전의 어느 날, 비장해 보이기 까지 한 이 남자들의 앞으로 뚝 떨어진것 같았다.



<바티뇰의 아틀리에> 앙리 팡탱 라투르, 1870년, Oil on canvas,  204 x 273.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은 친절하게 이 그림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놓았다.


이젤 앞의 1번은 에두아르 마네다.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지만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 그를 따르던 '그 당시의 요즘 것들'이 마네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만 설명하자면 4번의 잘생긴 남자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다. 그 옆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수염을 붙여놓은 듯한 부티나는 인물이 우리에게 <목로주점>으로 유명한 에밀 졸라다. (목로주점보다, 그의 이름 때문에 더 유명한가?)


7번의 키 큰 친구는 프레드릭 바지유로 예전에 그에 관해 쓴 글이 있다. 금수저에 마음씨까지 금처럼 빛났던 바지유 덕분에 가난한 르누아르와 모네가 젊은 시절 그림을 열심히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맨 오른쪽 8번이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클로드 모네다.


그들은 밤이면 카페 게르보아에 모여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며,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는 새로운 예술의 방법론을 찾아 고뇌하였다.


1870년에 그려진 그림이니 르누아르, 모네, 에밀 졸라가 막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이다. 화단에서 끊임없이 무시당하고 비난당했던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들을 묵묵히 이끌었던 마네의 모습속에서 세상에 도전하는 열정과 끊임없는 질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고뇌가 그대로 읽힌다. 150년 전에도 청춘은 아파야 했었나보다.


최백호 아저씨에게 낭만이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텅빈 가슴 속에 들어있지만 나의 낭만은 '오래된 그림 속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낭만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 글의 초안을 써 놓고 10시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는데, 최백호 아저씨가 DJ인 라디오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어머 이런 우연이...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나의 낭만은 여전히 진행중이니 제가 이겼죠?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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