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기본은 다름의 이해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카톡을 보내왔다. 인터넷 뉴스의 링크였다. 링크를 열어보니 "기성세대가 정한 게임중독 기준, 틀렸다"라는 제목의 다소 긴 글이었다. 5월 12일 열린 게임장애 학술대회에서 이장주 박사의 발표를 정리한 기사였다. 발표의 핵심은 대한민국이 게임을 바라보는 시각이 구시대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변했고 이에 우리 청년은 잘 적응하는데 기성세대는 따듯한 눈으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며 제대로 된 인식으로 게임을 바라봐야 4차산업에 잘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들은 이 기사를 읽고 자신들의 편에 선 어른이 있음에 안도하며 한편으론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카톡을 보냈으리라.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은 비단 교육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에서도 미래를 짊어질 젊은 인재들을 찾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이고 그 인재의 중요한 덕목은 ‘창의성’임을 하나같이 강조한다. 그러나 창의적인 21세기의 젊은이를 뽑는다 한들 20세기의 리더들은 그들의 창의성을 포용할 크기의 그릇이었을까? 어떤 조직의 신입사원이 되는 순간 그들은 신입사원 연수라는 명목 하에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비판과 질문 없는 교육을 이수한 후 새내기 사회인이 된다. 실전에 투입되면 그들은 팀장이 시키는 일에 “왜 그렇게 해야 되죠?”라고 묻거나 “오늘은 선약이 있어 회식에 참석 못하겠는데요.” 라고 하거나 야근하는 선배를 남겨두고 퇴근을 하려 하면 “요즘애들은 왜 그래?”라는 비난 섞인 말과 함께 끌끌 혀 차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근래 들어 “세대간 소통”을 주제로 강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란 생각에 반갑기도 하고,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면 외부강사까지 초빙할까 하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하다. 소통의 본질은 ‘다름에 대한 이해’인데 나와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다 깨나도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예전에 쌓아 놓은 지식과 가치를 기준으로 지금을 해석한다. 금리가 10%이던 시절에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면 집장만이 가능했던 세대는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을 뛰어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이는 요즘 세대의 안정지향적 마인드를 이해할 수 없다. 약속장소에 가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누군가를 기다려본 세대들은 컴퓨터 클릭 한번으로 음원을 사고 영화를 보는 세대의 조급함을 이해할 수 없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지금을 행복을 미래로 미루었던 세대는 첫 월급을 타서 자신만의 여행을 계획하는 지금의 세대가 서운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들의 세상은 누가 만들었을까? 2017년 대비 게임 산업은 77%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하철역의 대형광고판엔 새로 나온 게임의 광고로 가득 차 있고, 영화배우들은 각종 게임광고로 수입을 늘리고 사업종목에 IT, 소프트웨어, 모바일 콘텐츠가 들어가 있으면 일반 기업에 비해 대출가능금액의 단위는 자릿수 하나가 더 늘어난다.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나고 자란 세대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말로 낙인 찍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불교에서 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인 인드라망(網)은 한 없이 넓고 이음새마다 구슬이 달려있는 그물이다. 구슬은 서로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비추어 주는데 이는 마치 인간세상의 모습과 같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비추고 있는 밀접한 관계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요즘 세대를 볼때마다 그들에게 비춰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대들, 기성세대가 잘못한 것은 겸허하게 사과하고 그들이 더 잘 살 수 있도록 응원해줄 때 비로서 우리들은 어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되지 않을까?
아들에게 “좋은 기사 보내줘서 고마워”라고 카톡 답장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