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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6. 2018

글, 그림, 그리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어학자의 연구를 보면 '글'은 '긁다'와 그 뿌리가 같은 말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긁는 행위와 같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난 것 같다. 

결국 어원적으로 볼 때 글은 긁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도 억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문인들이 원고를 쓰는 것을 '긁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만한 일이다. 


'그림'이란 말도 그 어원은 글이나 긁다와 같은 뜻이다. 

글씨를 긁으면 글이 되고, 모양을 긁으면 그림이 된다.

'그리움'이나 '그리다'란 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모습을 긁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러니까 그리움이란 말은 종이가 아니라 마음속에 쓴 글이요, 그림인 셈이다.


이어령 <오늘보다 긴 이야기> 중




내가 다니던 H대 앞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카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달리 특출 날것도 없는 평범한 카페였거늘 난 지금도 그 카페의 간판이며 칠 벗겨진 나무 사이로 난 출입구, 차도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입구 앞 보도와 그 주변 공기의 밀도까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한 바탕 눈이라도 내리고 나면 미처 눈을 쓸기도 전에 그 앞을 지나치는 행인들의 발자국에 꾹꾹 눌려진 눈은 

거울같이 하얀 바닥이 되어 버리곤 했다. 안 그래도 차도 쪽으로 기울어진 보도는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슬로모션을 연출하게 만들었다. 난 내 갈길을 멈추고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코끝이 시려질 때쯤 킥킥거리며 조심스레 발을 떼면 

어느새 그곳이야말로 내게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 되어 있었다. 


어릴 적 만났던 샤갈은 그 이름이 주는 묘한 어감과 그의 그림에 쓰인 색상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샤갈'이란 이름 외엔 그 어떤 이름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나를 사로잡은 색은  파란색, 푸른색, 푸르스름한 밤의 색, 파아란 색, 코 끝이 시린 색, 숨의 색, 슬픈 색, 그리움의 색으로 느껴지는 샤갈의 파란색, 그것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염소와 수탉, 하늘에서 내려다본듯한 마을의 지붕들, 

뭔가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야릇한 즐거움과 리듬. 

그리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또 다른 외로움



샤갈은 러시아 비테프스크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화가다. 그의 거의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마을은

자신의 고향 비테프스크이고 샤갈은 많은 그림 속에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러시아와 프랑스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던 샤갈은 우연히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 벨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벨라와 결혼한다. 벨라는 샤갈의 뮤즈였고, 인생의 동반자였으며 기쁨의 원천이었다. 


사진출처: artslife.com


행복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벨라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샤갈의 시간도 멈추고 만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로 50대 후반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붓을 놓은 적이 없었지만 

벨라의 죽음은 샤갈의 영혼마저도 데리고 간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절망에 빠진 샤갈을 위해 딸 이다는 벨라의 회고록을 출판하기로 한다. 

그 회고록에 삽화로 들어갈 그림을 샤갈이 그려주기를 바라면서. 

9개월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샤갈은 다시 그림을 그린다. 바로  아래의 그림  <그녀 주위에>다. 



마치 스노볼 같은 중심의 원안엔 벨라와의 추억이 가득한 비테프스크가 그려져 있고, 

딸 이다는 비테프스크를 안고 있다. 자주색 원피스를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가느다란 초승달 때문인지 비탄에 빠진 창백한 모습이다. 

그림 윗부분의 새 한 마리와 촛불은 그녀에 대한 애달픈 사랑이겠지



사랑을 잃은 남자는 자기 기억을 긁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이내 그리움이 되고

그림은 또다시 푸른색으로 칠해져 남자의 심연에 닿아 기억 위에 다시 그리움의 더깨를 드리운다.


그런데 

그 푸른색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벨라가 입고 있는 원피스의 자주색과

결혼하는 한쌍의 뒤로 드리운 나무의 녹색 때문이다. 

푸른색과 전혀 다른 색들이 푸른색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슬픔의 바닥에 닿았을 때 비로소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작은 빛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겠다고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선다.



샤갈은 나중에 바바라는 여성을 만나 다시 사랑하게 된다. 결혼은 하지 않은 채 행복하게 잘 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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