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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30. 2018

정답을 깨는 질문을 하라

늙는다는 것은 처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처음’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는 생각보다 넓고 깊다. 단어에 ‘첫(처음)’이 들어가는 순간 그 의미는 훨씬 개인적이고 풍부해진다. 사랑이 첫사랑이 되고, 출근이 첫 출근이 되고, 월급이 첫 월급, 경험이 첫 경험이 되는 순간 그 단어는 마법처럼 개인적인 서사를 품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나이 들어가며 점점 단어에 ‘첫’ 자를 붙일 일이 없어진다. 웬만한 일은 이미 다 경험해본 일이 되고 우리의 삶에 처음이란 단어를 붙일 일이 사라진다는 것은 ‘처음’이 주는 설렘과 흥분 또한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


경험한 것이 많을수록, 다시 말해 나이 들어 갈수록 우리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가 되어갈 확률이 높아진다. 변화와 혁신이 중요하다는 기업에서도 조직원들의 아이디어에 “이미 내가 다 해본 거다”, “네가 몰라서 그렇다”라고 답해주는 답정너 상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변화와 혁신은 정답이 아닌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정해진 답이 아닌 다른 답을 찾기 위한 모색과 함께 정답을 깨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는 예술가들을 통해 그러한 질문들을 배울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미국의 독립예술가협회가 주최한 앙데팡당전에 이상한 작품이 응모되었다. ‘R.Mutt’라는 서명이 한 귀퉁이에 쓰인 남자 소변기였다. 주최 측은 이 작품을 검열한 후 전시를 거부한다. 유명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 이야기다.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것은 예술일까? 만약 예술이라면 무엇이 이것을 예술로 만드는 걸까? 아니라면 예술가인 내가 한 이것은 무엇일까?”

그 당시 무시당했던 이 작품은 82년이 지난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700만 달러에 낙찰됐다. 뒤샹이 던진 이 질문은 현대미술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기성 제품(레디메이드)도 작가의 선택에 의해 주제와 의식을 불어넣는 순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과 솜씨만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원래 기능과 관념적 요소에서 벗어나 새로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레디메이드 미술의 탄생은 그의 그런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르셸 뒤샹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의 예술가 피에르 만조니의 질문 또한 도발적이다. 만조니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자행되는 예술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부유층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비싼 가격에 사들이고 소장하는 모습을 보며 “예술가가 행하는 모든 행위가 예술일까?”라는 질문을 미술계에 던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변을 담은 캔 90개를 만들어 ‘Artist’s Shit’(1961)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품은 사회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30그램의 변이 담긴 통조림은 그 당시 동일한 무게의 금값 37달러에 불과했지만 약 50년이 지난 2008년에 약 2억 3000만 원에 거래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피에르 만조니와 그의 작품 <예술가의 똥>



2003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에 관한 영화다. 술을 좋아하는 평범한 샐러리맨 오대수(최민식 분)는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15년 동안 사설 감금방에 갇힌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이 납치당했던 장소에서 풀려난다. 오대수는 감금방에서 매일 먹었던 중국집 군만두를 단서로 자신이 갇혀 있던 감금방을 찾아내고 자신을 가둔 장본인인 이우진(유지태 분)을 만나게 된다. 일본 만화가 원작인 ‘올드보이’가 제57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Grand Prix)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박찬욱 감독이 원작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며 영화의 줄거리를 이어간 데에 있다. 감독의 의도는 배우들의 대사에 잘 드러나 있다. 왜 자신을 가둔 거냐고 묻는 오대수에게 이우진은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은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란 말이야”라고 질문을 수정해준다. 원작과는 다른 전개, 다른 결말의 영화로 국내는 물론 해외 영화계에서까지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작에서 이미 정해진 답을 깨뜨리고자 했던 감독의 질문이었다.

뒤샹이나 만조니, 박찬욱은 기존 체제를 부정하며 모두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깨뜨리는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각자 구축해놓은 정보의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답을 찾아낼 수 없을 때, 사고의 ‘처음’이란 것을 경험하게 된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사고의 ‘처음’ 또한 우리에겐 설렘과 흥분이라는 감정을 선물한다. 더 이상 세상이 신비롭지 않거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데면데면해진다면, 그래서 지루하고 인생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면 좋아하는 예술가의 그림 한 폭,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보며 그 작품 속에 몰래 숨겨져 있는 ‘정답을 깨는 질문’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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