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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15. 2019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고찰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엔 피카소의 시녀들 이란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무려 쉰 여덟점의 연작인데요, 일흔 여섯 살의 피카소가 다섯 달 동안 강도높게 몰입하여 그린 그림들입니다. 쉰 여덟점의 연작은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 한가지를 재해석 해서 다시 그린



피카소뿐이 아닙니다. 고야, 달리, 클림트, 마네 그리고 현대로 와선 헤밀턴, 보테로, 위트킨까지 이 그림을 재해석 해서 다시 그렸습니다. 왜 이 그림이 이렇게 많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재 해석되고 있는 걸까요?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17세기 유럽 회화의 중심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15세기 말의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엄청난 부가 쌓이고 인구가 늘어났으며, 왕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엄청나던 시절이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1656년경 제작된 이 작품은 1666년 왕실 소장 미술품 목록에서는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말 몇몇 궁정 문서들은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 초상화”라고 언급하였으며, 다시 그 이후의 문서들은 <가족도(El Cuadro de le Familia)> 또는 <펠리페 4세의 가족 (La familia de Felipe IV)>라는 제목으로 기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현재 널리 알려진 <시녀들>이라는 제목은 1843년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게 된 제목입니다. 하나의 그림인데 왜 이렇게 제목이 다르게 전해지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 그럴 수 도 있겠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 그림은 가로 3미터 18센티, 세로 2미터 76센티미터 인데요, 이 그림 안에는 그림의 실제 크기와 같아 보이는 캔버스를 앞에 둔 화가와 마르가리타 공주, 그녀를 수행하는 두 시녀, 그 시녀의 시중을 드는 중년의 여성과 남성, 두 명의 난쟁이와 개, 그리고 가장 먼 곳에 보이는 문의 바깥쪽 계단에 서있는 신사가 보입니다. 얼핏 보면 다른 바로크풍의 그림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만 왠지 모를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그 이유는 그림 속 인물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림 속 세계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그림 밖의 세계를 궁금해 하며 구경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볼까요?


맨 먼저 우리 눈을 끄는 것은 [시녀들]이라는 제목처럼 공주의 옆에서 시중을 드는 두 소녀들입니다. 정적인 자세로 서있는 공주보다는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시녀들을 바라보다 보면 다시 시선은 두 시녀 사이에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로 모아집니다. 분명 이 그림의 주인공은 중앙에 빛을 받으며 서있는 공주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나 왜 이 그림을 공주의 초상화로 보는 견해 말고도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라고 보기도 하는 걸까요? 공주의 왼편에는 팔레트를 들고 서있는 벨라스케스 모습이 보입니다. 화가는 그림 속에서 그림 밖을 보고 있으며 동시에 그림 밖에서 안을 보고 있는 주체입니다. 자신을 관찰하는 관찰자이며 동시에 등장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이 그려지고 난 후 벨라스케스는 몇 가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왕에게 훈장을 받게 되는데요, 그림속 벨라스케스의 가슴에 그려진 빨간 십자가 표시가 바로 그 훈장이고, 맨 처음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엔 없었던 훈장을 5년 후 다시 그려 넣음으로,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 자신의 영광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보기도 하는거죠.


또 다른 분석은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순간 공주가 벨라스케스의 화실에 들른 모습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화면의 가운데 벽에 걸린 거울에는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 비쳐져있고 이 광경 전체를 커다란 거울에 비춘 후 그 모습을 그린것이라고 보는건데, 마르가리타 공주의 다른 초상화와는 달리 공주의 가르마가 반대쪽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림 속 인물들이 실제로 보고 있었던 것은 거울에 비친 왕 부부였을 것이며 완성된 그림을 개인 집무실에 걸어놓았던 왕은, 자연스럽게 모인 듯한 인물들이 자신을 찾아와 보고 있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로써 왕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의 대상인 동시에 그림의 주체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 작품은 미셸 푸코가 1966년 [말과 사물]에서 거론한 이후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유명해진 그림입니다. 이 작품의 매력은 이렇듯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그 의미를 만족할 만큼 명쾌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볼 때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열 두 살이 되던 해 마드리에서 가장 큰 아뜰리에인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공방에서 도제로 있으며 6년간 회화 기법, 기독교 도상학 등을 배웠습니다. 23세가 되던 해 스승의 권유로 마드리로 가서 초상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듬 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됩니다. 이때부터 6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두 번의 이탈리아 여행 기간을 제외한 평생을 그는 마드리드와 인근의 왕궁들에 거처하며 펠리페 4세의 화가이자 궁정인(courtier)으로 살게 됩니다. 당시까지도 스페인에서 화가는 농부, 대장장이와 비슷하게 여겨지던 존경 받지 못하는 신분이었답니다. 돈을 받고 노동력을 판다는 것 자체가 천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또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교로 스페인에선 멸시의 대상이었기에 벨라스케스는 왕의 인정을 받아 귀족 신분을 얻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죽기 바로 직전 귀족신분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벨라스케스는 평생 100여점의 그림밖에 남기지 않았지만 빛과 색이라는 순수하게 회화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그리는 방법’ 자체를 혁신하여 18세기의 고야, 19세기 마네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 20세기 피카소, 달리,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셸 푸코에 이르는 미술사 안팎의 수많은 인물들에게 강력한 영향과 영감을 준 ‘화가 중의 화가(the painter of painters)’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본래의 모델인 왕과 왕비는 뒷편 중앙 거울에 비치게 하고, 중앙 좌측에서 캔버스를 앞에 두고 붓을 잡은 화가 자신을 배치한 후 화면의 중경은 어둡게, 전, 후경에 빛을 배치한 공간표현과 구도는 그 이전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벨라스케스만의 독자적이고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스페인 세비야와 마드리를 떠난적 없었던 그가, 평생 왕실의 궁정화가로 일했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파격적이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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