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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1. 2019

이발소 그림이라 부르지 마오

어느 보쌈집에서 만난 밀레의 <만종>

금요일 저녁에 친한 친구와 마시는 술 한잔은 흘러간 버린 한 주를 아쉬워하고, 다가올 새로운 한 주를 환영하는 나만의 소박한 예식주다. 어떤 메뉴에 어떤 술을 곁들일까 하는 작은 고민을 즐기고, 조금 더 마실까 하는 변함없는 갈등을 밀어내며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한편으로 특별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그 시간이 소중하다.


몇 주전 갔던 종로의 어느 보쌈집. 무르익은 분위기에 안주가 떨어져 갈 무렵 친구와 나는 동시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어쩜 생리현상도 비슷하냐 하며 친구를 먼저 보냈다. 잠시 후 친구가 돌아오고 내가 화장실로 향했다. 시끌시끌한 보쌈집, 몇 개의 테이블을 거쳐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장님이 틀어놓은 90년대 가요를 흥얼거리며 화장실의 오른쪽 칸으로 들어갔다.


순간 나는 경건해지고 말았다.  밀레의 <만종>이 커다랗게 출력되어 한쪽 벽면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빨갛게 상기된 뺨으로 변기에 앉아서 그림을 바라보던 나는 '처음처럼' 소주에 빨간 뚜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여자화장실이었음에도 그림의 특별한 위치 몇 군데에 구멍이 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갑자기 슬퍼졌다. 밀레의 <만종>도 슬펐고, <만종>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명 이발소 그림으로 취급되는 게 슬펐고, <만종>이 소주의 광고로 쓰인것도 슬펐다.


               

<만종>의 원제는 L'Angélus, 삼종기도다. 삼종기도란 가톨릭에서 아침·정오·저녁 3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기도로 성모가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기도이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1865년에 밀레는 “자신의 그림 <만종>은 옛날에 할머니가 들에서 일하다가도 종이 울리면 일을 멈추고, 죽은 가엾은 이들을 위해 삼종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음을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감자를 캐다가 종이 울리자 기도를 하고 있는 두 부부의 발치에 바구니와 농기구들이 보인다.  <만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슬픈 그림'이란 수식어가 많이 눈에 띄는데 감자 바구니의 아래쪽엔 죽은 아이의 관을 그렸던 흔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무 가난하여 아이가 먹지 못해 죽었고, 그 아이를 묻고 기도하는 부모라는 그런 이야기. 그러나 이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설사 그림 아래쪽에 다른 것을 그렸던 흔적이 있다 해도 그것이 아기의 관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만종>이 슬픈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이라는 곳에서 살았던 밀레가 1857년부터 그려 1859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당시 그림들이 신화와 역사를 주로 그리던 것에 반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그것도 가난한 농민들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 회화의 명작으로 꼽힌다.


밀레가 2년간이나 공을 들여 그린 <만종>을 처음의 약속과 달리 의뢰인은 구입하지 않았다. 가난했던 밀레는 어떻게라도 이 그림을 팔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1년이나 지나 3000프랑의 낮은 가격에 겨우 팔 수 있었다.


1875년 밀레가 죽고 나서야 그의 작품이 인정받으며 작품의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만종>의 소장자가 여러 번 바뀌었다. 그리고 밀레 사후 14년이 지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된 뒤 경매에 올려진 이 작품은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치열한 경매 경쟁을 불러왔다. 밀레의 진가를 알게 된 미국은 이미 많은 밀레의 그림을 사들이며 <만종>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만종>만큼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프랑스 몇몇 기부자들은 합심하여 경매에 입찰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만종>은 1890년 다시 프랑스 유통업계 대부인 알프레드 쇼사드가 75만 프랑에 이 그림을 되사서 프랑스로 가져온다. 알프레드 쇼사드는 죽을 때까지 소장하고 있던 <만종>을 1909년 루브르에 기증하였고,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렇듯 소장자가 계속 바뀌어가며 맨 처음 3000프랑이었던 그림은 75만 프랑이 되었지만 정작 밀레는 생전 가난함을 면치 못했고 이후의 유족들도 전혀 이익을 가지지 못했다. 음악·영화·문학은 다시 팔릴 때마다 수익이 발생하지만 미술작품은 한 번 팔리면 끝이기 때문이다. 이런 밀레의 사례 덕분에 프랑스는 1920년부터 추급권(Droit de suite)을 법제화했다.


추급권이란 미술가가 타인에게 판 작품이 또 다른 이에게 재판매될 때 그 대금 중 일정 비율을 작가나 저작권을 가진 유족이 배분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유럽연합(EU) 전 회원국에서도 2006년 추급권의 도입이 완료됐고 재판매 금액의 0.25~4%가 작가나 유족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추급권의 인정기간은 저작권 유지기간과 동일한 작가 사후 70년까지다.



밀레의 사례와 같은 사태를 장 루이 포랭이 풍자한 만화가 있다.

신사들이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열을 올리며 있고 그들의 뒤에선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 둘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아빠 그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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