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

by 이수정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의 리듬에 몸을 맡기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엔 피곤함과 안도감이 섞여있다. 빈자리가 없어 서있는 나의 앞에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앉아있다. 고개를 창에 대고 지긋이 눈을 감은 그는 잠이 든 건지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핏기 없어 보이는 하얀 얼굴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아저씨의 두 발 사이에 놓인 종이봉투로 눈길이 갔다. 크래프트지로 만든 빵집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하얀 슈가파우더를 이마에 곱게 묻히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슈크림 빵. 아저씨의 나이로 보아 자녀들은 모두 20대가 넘었을 것 같은데, 달달한 것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한 것이었을까? 특별할 것 없는 아저씨의 어느 하루가 슈크림 빵 덕분에 달콤하게 기억되겠구나.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은 아가씨의 쇼핑백 속엔 수영할 때 쓰는 물안경과 스포츠 백이 들어있다. 저녁 운동을 하려는 모양이다. 문간에 서있는 남학생이 바닥에 내려놓은 쇼핑백엔 신발 박스가 들어있다. 새 신발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을 우리는 안다. 오죽하면 그 마음을 노래로 만들었을까?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작은 피자 박스를 든 청년,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샐러드와 빵 봉투를 들고 있는 회사원, 사람들은 저마다의 취향과 누군가의 입맛을 위한 갖가지 것들을 들고 덜컹덜컹 같은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나와 내 동생은 매일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파란색 잉크로 '영양센터'라는 글자가 인쇄된 누런색 봉투를 들고 오시는 날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매번 그 기다림은 실망으로 이어졌고, 실망이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환상처럼 군데군데 기름에 젖은 누런 봉투를 맞이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요즘에도 그 당시 영양센터 방식으로 치킨을 만드는 곳이 있던데 확실히 예전에 느꼈던 그 맛은 아닌 듯 해 아쉽다.


그런 기쁨을 알기에 나도 집으로 들어갈 때 아들을 위해 간식거리를 챙긴다. 얼마 전까지 사무실이 연남동에 있었던 탓에 메뉴도 다양했다. 구르미산도, 큐브 스테이크, 반미 샌드위치, 아이리쉬 포테이토, 타코, 파니니, 케밥 등등. 새로운 메뉴를 사들고 집에 가는 날엔 아들의 반응이 궁금해 나의 긴 퇴근길이 설레고 행복했다.


얼마 전 정주행 한 '나의 아저씨'에서 남자 주인공 박동훈(이선균)은 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 강윤희(이지아)에게 전화를 걸어 "뭐 사가?"라고 묻는다.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던 윤희는 동훈의 이런 물음에 늘 "그냥 와"라고 이야기한다. 아내의 바람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훈은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여 주인공 이지안(아이유)은 박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동훈의 생활 모두를 듣고 있었는데, 드라마의 마지막에서 이지안은 박동훈의 말 중 '뭐 사가?'라는 말이 가장 따뜻한 말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뭐 사가?"라는 말은 단순히 필요한 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뭐 사가?" 라는 말에는 사온 그것을 나누기 위해 마주 앉는 일,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일, 그 날의 이야기를 나누는 일, 그래서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일 모두가 들어있는 것이다.


어쩜 이 세상의 모든 따스한 말들은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의 말들 속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엄마의 "밥은?"이란 말, 아버지의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라는 말, 아들의 "엄마 언제와?"라는 말, 남편의 "늦어?"라는 말은 단순히 밥을 먹었는지, 끼니는 챙기는지? 몇시에 돌아오는지? 늦게 오는지가 궁금한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치열한 하루를 염려하고 응원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말 속에 꼭꼭 숨겨놓은 것이다.


후줄근한 봉투안에 들어있던 달콤한 슈크림 같은 말이 있어서 우리는 또 내일을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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