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28년 만의 사과

by 이수정


맛있는 걸 먹어도, 좋은 걸 봐도, 여행을 가도 그 사람에게 주고 싶고, 함께하고 싶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지? 대학교 때 처음 사귄 남자 친구는 가족들과 휴가를 가서도 내게 편지를 썼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리조트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은 가족의 시선을 피해 어느 벤치에 앉아 편지를 썼고, 객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아버지는 "쟤는 시인이야? 도대체 뭘 쓰는 거야?"라고 했단다.

휴가에서 돌아온 그 보다 나중에 도착한 우표 붙은 편지는 그 나이에 걸맞은 유치한 사랑의 맹세와 파도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흔들리는 필체로 적혀있었지만, 내심 난 그의 사랑을 선물 받은 것 같아서 행복해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미술대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미술학원 교사였다. 몇 군데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우연한 기회에 선배가 하는 작은 미술교습소를 인수하게 되었다. 3~4평 되는 작은 방의 한쪽 면이 큰길과 바로 접해있었고, 그 길을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였고, 왼쪽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동네였다.


오른쪽 동네 아이들의 머리는 항상 잘 빗겨 있거나, 깨끗하게 묶여 반짝이는 방울을 달고 있었고, 매일 다른 옷을 갈아입고 왔으며 초콜릿이나 쿠키 등을 들고 와서 먹곤 했다. 반면 왼쪽 동네 아이들은 후줄근한 운동복을 거의 매일 입고 왔다. 겨울엔 뺨이 터서 발그스름 해 진 얼굴이 촌스러워 보였고, 늘 가장 늦은 시간까지 교습소에 남아있었다.


특히 두 동네 아이들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이들의 엄마가 교습소에 들리는 횟수였다.

왼쪽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을 교습소에 등록할 때 빼고는 거의 오지 않았고, 교육비를 내는 날도 아이들이 직접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오른쪽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거나 데리고 가기 위해 매일을 교습소에 왔다. 어느 날은 내게 어울릴 것 같다고 예쁜 스카프를 사들고 오고, 어느 날은 여행길에 사 온 무항생제 계란을 내게 안겨 주기도 했고, 또 다른 날은 유명한 칼국수집에서 칼국수를 그릇째로 사가지고 와서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일과가 끝나갈 무렵 오른쪽 동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오면서 파운드케이크를 사 가지고 왔다.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요청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의 의자에 조그맣게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 교습소엔 아직 집에 돌아가지 않은 왼쪽 마을의 7살 여자아이가 남아있었다. 또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뺨이 붉은 아이였다.


하하 호호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얼핏 돌아보니, 그 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져드는 순간 그 아이가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응 그래~ 잘 가! 내일 보자"라고 성의 없이 인사말을 던졌다.


파운드케이크를 사 온 학부형이 돌아가고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끼익~"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교습소의 미닫이 문은 틀에서 약간 내려앉아 열고 닫을 때마다 새시가 밀리며 소리를 내곤 했는데 모두가 돌아간 그 시간에 문 열리는 소리는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문 앞으로 달려갔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다 집으로 돌아갔던 뺨이 붉은 아이였다.


5분 남짓한 거리의 집에서부터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다 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앞으로 한번 굽혔다 일어난다. "휴우~"하고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나를 바라본다.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 아이의 얼굴엔 자신감과 행복함이 어려 보였다. 그리고 뒷짐진 손에 무언가 들고 있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도 선물 가지고 왔어요!"


'저도... 선물을?' 이게 무슨 말이지? 머릿속으로 상황 파악을 해 보았다.

아까 파운드케이크를 사 온 엄마를 향해 과도한 감사함을 전하며 오버 액션 했던 내가 떠올랐고,

이전에도 내가 받았던 많은 선물들을 향한 기쁨을 의식적으로라도 학부모들에게 보였던 내가 떠올랐다.

정리해보자면 오른쪽 동네 엄마들이 내게 무언가 선물을 해 줄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는 뺨이 빨간 아이가 있었고, 선물을 받은 대가로 다음날이면 그 엄마의 아이들을 한 번 더 칭찬해 주는 모습을 그 아이는 바라보고 있었으리라.


많은 생각이 빠르게 지나는 동안 아이는 뒤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 코앞에 들이민다.


"선생님! 이거!"


제 손에 있던 선물을 얼른 내손에 옮겨주더니 다시 뒷짐을 지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그리고 무언가 기다리는 모양새다.


"아! 고.. 고마워! 어머나~ 이거 참..... 좋네, 아니... 맛있게 생겼구나..."



당근이었다. 당연하지 할 때 그 당근이 아니라 보쌈집 가면 오이와 함께 몇 조각 썰어주는 그 당근 말이다.



방금 뽑은 듯 찰진 검은흙이 묻어있고, 녹색 줄기도 조금 남아있던 아주 실한 당근 하나.
아마도 시장에서 막 돌아온 엄마의 시장바구니에서 몰래 꺼내 냅따 뛰어왔을 거다.

뛰면서 생각했을 거다.


나도 선생님한테 줄 것이 있다고, 그래서 신난다고, 선물을 주면 선생님이 날 칭찬해줄 거라고..

그 당근이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줘!"


한참 동안 어정쩡하게 서서 당근을 들고 있던 나는 그만 툭 하고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 당근만큼 "많은 이야기 혹은 강렬한 한 개의 메시지"를 담은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





출판사 편집장이었던 지인이 2학년 짜리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사서는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단다. 크리스마스날 눈을 뜨고 허겁지겁 선물을 뜯어본 아들은 "에이씨! 산타할아버지 구려!!! 으앙!!!"하고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단다.

어찌 되었건 선물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비슷한 무게로 만날 때 생기는 화학적 반응도 믿음과 사랑을 쌓는 하나의 벽돌이 되니까.


좋은 선물, 감동적인 선물, 가성비 최고인 선물, 유티크 한 선물, 해외여행 선물... 수없이 많은 선물 중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선물이 하나 있다.


이 세상 최고의 선물 은 바로 당신, 당신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줌이야 말로 내 삶을 완전체로 만든다는 것을 나이 들수록 더 격하게 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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