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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r 30. 2020

아주 사소하고 중요한 것들

1일 1글 시즌4 [episode 01]

어느 날, 아들이 말한다. 


"엄마! 자취의 좋은 점이 뭔 줄 알아? 엄마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자취의 나쁜 점은... 엄마가 없다는 거야"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아들은 대학생이 되면 자취를 할 거라고 공언하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자 자취가 자신의 삶에 더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판단했는지 '자취'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했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코로나 19 사태로 집안에 꽁꽁 발이 묶여버린 아들은 자취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소리와 함께 집밥을 하루 세 끼, 그것도 한 달 동안 즐기고 있다. 선천적 집돌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아들은 참으로 철저하게 자가격리를 하고 있고, 찬란한 인생의 봄을 즐겨야 할 20학번 대학 신입생이 가질만한 현실 한탄 우울감 같은 것은 개나 줘버렸는지 온라인 수업과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고(지말로는) 틈틈이 게임을 즐기며(내가 보기엔 온종일) 이 시기를 잘 버티고 있다. 


강연이 주업인 나는 2월, 3월은 물론 계획된 4월의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재택근무 모드로 바뀌어 삼식이 아들과 함께 삼식 하는 엄마가 되어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기이한 상황들을 접하고 있다. 


냉장고 속에서 상하거나 말라서 버리는 식재료들이 없어졌다. 쌀통이 너무 빨리 비어버리고, 재활용 쓰레기를 하루라도 내다 버리지 않으면 주방 구석구석에 플라스틱이며 비닐 산들이 생기고, 가장 작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도 매번 채우지 못해 버리며 아까워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작은 걸 산 것 같아 후회스럽고, 삼일 동안 공들여 만든 아들의 떡진 머리카락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흠짓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는 것. 생돈 나가는 것 같이 느껴졌던 넷플릭스 요금 12,000원이 아깝지 않다는 것 등등.


그리고 이전엔 몰랐던 다른 몇 가지는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는데, 아들은 밥을 먹고 난 후 항상 자신의 그릇과 수저를 항상 싱크대에 가지런히 가져다 놓았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고 난 후 드라이어의 코드선을 두 번 접어 항상 같은 모양으로 묶어 놓는다. 온라인 수업이지만 강의를 듣고 난 후 부과된 과제는 바로 한다는 것 등이다.


코로나 19가 우리 모두의 삶을 정지시켰고, 지난 두 달간의 나의 수입은 제로. 그로 인해 막심한 피해가 있지만 이렇게 긴 시간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니 이 시간을 다르게 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20살 성인이 된 아이라 어린 자녀를 둔 엄마들이 겪는 어려움과는 그 수준이 다를 것이다.)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서로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되지 않게 하려면 각자의 영역과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야 한다. 난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의 방에 들어갈 땐 항상 노크를 했다. 노크를 하고도 벌컥 문을 열지 않았다. 밥을 차리면서 아이에게 묻는다. 30분 후에 밥 먹을 건데 가능한지.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함께 하는 게임 중에는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이에게 배려를 부탁한다. 식사 후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을 땐 항상 그릇에 물을 채워주기를, 혼자 밥을 먹었을 땐 설겆기 까지 해놓기를, 샤워를 한 후 물이 튄 샤워 커튼은 물기가 잘 마르도록 최대한 겹쳐지는 부분이 없도록 넓게 펴주기를, 양말은 뒤집어지지 않도록 벗고, 갈아입은 옷은 항상 빨래 바구니에 넣어주기를, 가끔은 요리 솜씨를 발휘해 엄마의 식사를 준비해 주기를...


나에겐 사소하지만 상대에게 중요한 것들을 나 또한 중요하게 생각할 때 함께하는 삶은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선 근 한 달간 한 번도 큰소리가 난 적이 없다. 서로 한 번도 짜증을 낸 적이 없었고 서로에게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좁은 집 안이지만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하루 빨리 대한민국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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