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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Apr 03. 2020

글의 힘

1일 1글 시즌4 [episode 05]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교 신학 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이 상징하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라"


3학년 학생의 답안지엔 단 한 줄 만이 쓰여 있었고 최고점을 받았다.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이 붉어졌도다."

"Water saw its Creator and blushed."


그 학생은 후에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바이런이 된다. 


이 일화는 바이런 혹은 이름 없는 어떤 청년의 이야기로 떠돌아다니는데,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정보도 있다. 그 이유는 바이런이 태어나기 200여 년 전쯤 리차드 크래쇼(Richard Crashaw,1613~1649)라는 시인이 쓴 시 중 "The conscious water saw its God and blushed"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런이 알고 패러디를 했건 모르고 썼건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글을 쓰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 예수의 이야기가 한 문장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놀랍지 않은가?




저런 밀도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많은 의미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밀도 있는 문장의 만날 때가 있다.

눈은 글 줄을 따라가지만 어느새 눈의 초점이 풀리고, 단정한 입매무새를 위해 힘주었던 입술 끝의 근육이 느슨해져 입은 반쯤 벌어지고,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만들 틈도 없는 무방비 상태로 행간의 무한한 공간으로 떨어진다. 알레테이아의 순간!!!


30대에는 함민복 시인의 "당신 생각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잠이 들었고


벚꽃이 지는 밤이 유난히 슬펐던 어느 날 만났던

"저녁의 벚꽃 / 오늘도 또 옛날이 / 되어버렸네"

라는 하이쿠는 벚꽃 지는 밤의 외로움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 같아 위로를 받았고


개나리, 벚꽃이 화려함의 극치로 만개할 때 김훈 작가의 글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라는 문장이 떠올라 부러 산수유에 눈길을 더 주기도 했다.


모 노트북의 광고 문구 "역사를 바꾸는 것은 언제나 Pen이었다"처럼 글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경험할 때마다 글 쓰는 재능이 탁월한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그들이 남긴 많은 저작들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곤 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에 무언가를 남긴다.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사상으로... 

나는?이라는 질문을 던지기 조차 부끄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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