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열 배 더 재밌어지는 그림 보는 법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서양의 유물임에도 우리나라의 보물로 지정된 물건이 있다. 서양 유물이 왜 우리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을까?
1987년에 보물 제904호로 지정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 투구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살펴보자.
1936년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참가한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9분 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다. 당시 일제 강점기 시기였기에 손기정의 유니폼엔 일장기가 붙어있었다. 그러나 그는 우승자에게 주는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채 사진을 찍었다. 당시 동메달을 땄던 또 다른 한국 선수 남승룡은 정작 손기정의 금메달이 부럽지는 않았으나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월계수는 부러웠다고 말했다.
당시 그리스의 아테네 브라디니 신문사는 우승자에게 고대 제우스 신전에서 발굴한 그리스 청동투구를 부상으로 수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IOC는 아마추어 선수에게 메달 이외의 선물을 줄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손기정에게 투구를 수여하지 않았다. 일본 또한 손기정의 권리를 굳이 챙길 필요가 없었기에 투구는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박물관에서 주인을 잃은 채 보관되어 있었다. 이후 우연히 손기정은 자신에게 수여된 청동투구를 알게 되었고 50년 만에 투구는 주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1994년 손기정은 국가에 청동투구를 기증하였고, 현재는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어떤 식물로 만들었을까?
에이! 뭐 그렇게 쉬운 문제를 내시나? 하고 자신 있게 "월계수!"라고 외쳤다면? 글쎄?
정답은 잠시 후 공개한다!
아무튼 '마라톤 우승자는 왜 월계관을 쓰게 되었는가'가 오늘의 주제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나는데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며 음악, 시, 예언, 의술, 궁술을 관장하는 신이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아폴론은 태어나면서부터 헤라의 질투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아폴론은 태어난 지 나흘 되는 날 아버지 제우스로부터 황금 왕관과 현악기 리라. 백조가 끄는 마차를 받고 델포이로 떠났다. 그리고 델포이에서 헤라를 도와 자신과 아르테미스의 탄생을 방해했던 왕뱀 피톤을 사살한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피티아 제전을 만들고 4년에 한 번씩 경기를 열었다. 피티아 제전은 운동뿐 아니라 시와 리라 연주 경연대회도 열린 거대한 축제였다.
눈부신 외모를 가진 태양의 신 아폴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조가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며 세상에 빛을 준다. 이성과 예언의 신으로 합리적 인간의 상징이자 로고스의 상징인 아폴론은 자신이 활로 왕뱀을 사살한 일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앞에 나타난 꼬마가 그의 앞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이야!
어느날 자신의 앞에서 작은 활과 화살을 만지작 거리는 꼬마를 본 아폴론은 짐짓 어른스럽게 타이른다.
"꼬마야! 그렇게 위험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놀면 위험하단다. 그건 나 같은 어른이나 쓰는 무기란다.
애들은 그런 것 갖고 놀면 안 돼! "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꼬마는 에로스, 로마식 이름은 쿠피도(Cupido) 쿠피도의 영어 이름은 큐피드(Cupid)다.
아폴론의 말을 들은 에로스는 자신을 무시하는듯한 아폴론의 말이 영 불쾌했다. 원래 그 시기가 그렇지 않은가? 옳은 말을 하는 어른들의 태도엔 왠지 반항하고 싶어 지는 느낌!
"아저씨, 아저씨의 화살은 무엇이든 꿰뚫는 모양입니다만, 내 화살은 아저씨의 마음을 뚫을 수 있거든요! 쳇!"
에로스는 이 말을 하고 나서는 바위 위로 올라가 화살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꺼냈다. 뾰족한 금촉의 화살은 사랑하는 마음을 일게 하는 화살이고, 뭉툭한 납촉의 화살은 그 사랑을 거절하게 하는 화살이었다.
에로스는 아폴론을 향해 금촉 화살을,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강의 신 페네오스의 딸이자 요정인 다프네에겐 납촉 화살을 쏘았다. 에로스의 금촉 화살을 맞은 아폴론은 다프네를 끊임없이 연모하게 되었고, 납촉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그런 아폴론에게 도망쳤다. 둘 사이에는 끊임없는 추격적이 벌어진다. 그럴수록 아폴론의 사랑은 깊어만가고 그럴 수록 다프네는 더욱 멀리 도망쳐 버리다가 결국 아폴론에게 붙잡힌 다프네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아버지 페네오스에게 자신을 차라리 나무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한다.
강의 신 페네오스는 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순간 다프네의 몸은 굳어지고 가슴은 부드러운 나무껍질로 덮이기 시작했다. 팔은 가지가 되고 발은 뿌리가 되어 땅속을 파고 들어갔으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잎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아폴론은 절규하며 말한다.
"오! 사랑하는 여인이여! 내 비록 그대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대의 부드러운 잎을 왕관으로 만들어 쓸 것이며, 나의 리라와 화살통은 그대의 가지로 장식할 것이요. 또한 위대한 정복자들이 개선 행진을 할 때 그들의 이마에 그대의 잎으로 엮은 관을 씌움으로 그대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요! 그리고 늘 그대의 잎을 푸르게 하겠소"
다프네는 월계수로 변했다. 아폴론은 이 사건 이후로 전쟁과 경기의 승리자들에게 월계수 가지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주게 되었다.
성서와 더불어 그리스 로마 신화는 화가들의 단골 주제였다.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워낙 복잡한 신화의 계보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유독 자주 사용되는 소재들은 역시나 그들의 지물을 확인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 아폴론은 왼손에 리라를 들고 있다. 아폴론의 지물은 리라, 활과 화살, 화살통, 월계관 등이다.
니콜라 푸생의 <아폴론과 다프네>를 보면 아폴론의 뒤쪽에 놓인 리라와 화살통이 보인다. 아폴론은 월계관을 쓰거나 망토처럼 생긴 긴 튜닉을 입고 있기도 한다. 또 사자, 늑대, 개의 머리 셋이 달리고 뱀의 몸뚱이를 가진 괴물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태양 마차를 모는 아폴론의 모습도 있다. 중세엔 아폴론이 타고 다니던 네 마리 말들의 색이 모두 달랐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와 모두 흰색으로 통일되었다.
아폴론과 다프네의 왼쪽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상심한 노인이 보이는데 다프네의 아버지이자 강의 신인 페네오스다. 페네오스는 강의 신임을 표현하는 물이 쏟아지는 항아리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긴 노인으로 표현된다.
다시 맨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손기정 선수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은 어떤 식물로 만들었을까?
고대 그리스에는 4개의 커다란 축제가 있었는데, 올림피아 제전, 델포이 피티아 제전, 네메아 제전, 이스트미아 제전이다. 이중 올림피아 제전은 제우스 신에게 바쳐지는 제전으로 승리자에게는 야생 올리브관을 주었고, 아폴론 신에게 바쳐지는 피티아 제전은 승리자에게 아폴론의 상징인 월계관을 주었다. 시간이 지나며 최종적으로 위치상 가장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올림피아 제전이 전 그리스인이 참가하는 제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대의 올림피아 제전의 정신을 이어가는 올림픽은 우승자에게 야생 올리브 관을 주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올림픽의 상징을 올리브관이 아닌 월계관으로 알고 있는 걸까?
조금 전까지 살펴본 월계관의 유래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월계수는 아폴로 신의 상징이자. 아폴로의 염원대로 승자나 영웅의 머리에 씌워주는 영광의 상징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일반적으로 가장 탁월한 사람을 찬양하는 추상적 상징이 된 것이다.
제 1회 아테네올림픽에서 올리브관을 사용한 이후 개최국 생태계에 따라 우승자에게 주는 관의 나무가 달라진다고 한다. 실제 손기정 선수가 쓰고 있는 우승관은 북미산 대왕참나무 잎으로 만들어졌다. 양손으로 들고 있는 나무도 월계수가 아니라 대왕참나무 묘목이다. (손기정 선수의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자리에 조성된 손기정기념관에 이 나무가 심겨있다)
맨 마지막의 사진은 아폴론과 다프네를 주제로 한 예술의 백미인 베르니니의 조각이다.
빨리-많이-대충 에서 천천히-깊게-대화하는 여행을 만들어주는... 그림 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