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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정 May 27. 2018

1805년, 극강의 포샵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1799년 프랑스, 쿠데타를 일으킨 나폴레옹은 제1 통령이 된다. 서민의 썩은 밀가루 배급품을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강물에 버리는 이벤트로 나폴레옹은 서민의 대표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후 종신통령에 취임하였고 1804년에 실시된 인민 투표에서 찬성 350만 표, 반대 2500표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그는 자신이 합법적인 황제임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대관식을 계획한다. 또한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위해 대관식에 교황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교황 비오 7세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대관식 전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릴 것, 나폴레옹은 교황에게 왕관을 받을 것, 선서를 하여 자신이 교황권에 의존한다는 것을 강조할 것, 미사 중에 영성체를 받을 것.


그러나 나폴레옹의 생각은 달랐다. '왕관은 신이 아니라 국민이 주는 것'


후대에 길이 남을 대관식의 기록은 나폴레옹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황제의 제1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가 맡았다. 이미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으로 황제를 찬미하는 대작을 여럿 남긴 바 있다.



왼쪽: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 1804      오른쪽:  <알프스 산맥을 넘는 보나파르트>  폴 들라로슈, 1834  


대관식이 시작되자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교황 비오 7세는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왕관을 받게 될 나폴레옹에게 교황청의 권위를 보여줄 때라 생각했지만 나폴레옹은 교황이 들고 있던 왕관을 뺏어 직접 자기가 머리에 쓴다. 참석한 모든 사람이 당황했지만 어느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상황. 가장 당황한 사람은 대관식을 그리기 위해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화가 다비드였을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그려야 불경스럽지도 않고, 황제의 권위도 살릴 것인가? 자신의 역할을 빼앗긴 교황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차는 또 어떻게?

고민이 많았던 다비드는 이미 스스로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자신의 아내 조세핀에게 황후의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리기로 결정한다. (탁월한 아이디어다!)


1805년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맨 아래 1822년의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다비드는 대관식이 열린 후 1년간 꼼꼼하게 사전 준비를 했고 실제 제작에 2년이 걸렸다.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손짓을 하며 뒤쪽에 앉아있다. 처음엔 그냥 앉아 있는 자세로 그렸지만 나폴레옹의 주문으로 축복하는 손 모양으로 다시 그렸다. 벽 쪽의 1층 좌석 중앙에 실제 참석하지 않은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차가 앉아있다. 조세핀의 뒤쪽엔 나폴레옹의 두 형과 3명의 누이들이 서있다. 당시 조세핀은 40이 넘은 나이였음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젊어 보인다는 평가를 하자 다비드는 "나폴레옹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해보시던가"라고 했다는데...


왼쪽: 조세핀의 세부  오른쪽: 아래쪽 중앙에 앉아있는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차 보나파트르


베르사유 궁에 전시되어 있던 대관식 그림은 1889년에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에서도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볼 수 있는데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브뤼셀로 망명한 다비드가 1822년에 다시그린 작품이다. 가끔 어떤 그림이 진품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두 개의 그림 모두 다비드가 그린 그림이므로 둘 다 진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비드가 두 번째 완성한 그림은 첫 작품과 동일한 구도지만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 그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첫번째 작품에 이어 1822년에 그린 두 번째 <나폴레옹의 대관식> 첫번째 작품과 비교해서 다른점은 무엇일까?



아래 왼쪽은 1805년에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은 1822년에 그린 그림이다. 왼쪽의 여성부터 나폴레옹의 누이 캐롤린, 폴린, 엘리자, 그 옆은 나폴레옹의 형제인 루이의 부인 오르탕스와 조제프의 부인 줄리이다.

자세히 보면 폴린의 드레스의 색상이 다르다. 다비드가 폴린을 연모하는 마음에 드레스의 색상을 바꿨다는 말도 있고, 두 개의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두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행하던 드레스의 디테일이 다른 것으로 보아 단순히 그림을 구분하기 위해서 폴린의 드레스 색상을 바꾸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왼쪽이 1805년 작   오른쪽이 1822년 작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미술사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나폴레옹을 매우 미화시킨 작품임엔 틀림없다. 일종의 프랑스판 용비어천가랄까? 나폴레옹은 언론통제와 여론조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했다. 잉글랜드의 풍자만화가 제임스 길레이는 프랑스 초대 황제 나폴레옹의 대관식 행렬(1805)을 아래와 같이 그렸다. 탐욕스러워 보이는 황제와 황후, 권위를 잃은 듯한 교황, 피 묻은 칼과 불만 섞인 표정의 군인들.

나폴레옹은 제임스 길레이의 그림을 프랑스로 반입하는 자는 재판 없이 수감하라 명령했고, 본인이 잉글랜드 침공에 성공한다면 제임스 길레이를 찾아내겠다고 말했다.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나폴레옹 천하는 10년 만에 끝났지만 역사에 길이남을 대관식의 한 장면은 그 어떤 기록보다도 오래도록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 외에 어떤 말을 붙일 수 있으랴.



영국 풍자 만화가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행렬>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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